스타벅스 사태의 본질은 커피 한 잔의 문제가 아니다. 2026년 5월 18일, 5·18민주화운동 46주년 당일 스타벅스코리아 앱에는 ‘탱크데이’라는 표현과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가 등장했다. 탱크는 광주의 아픈 기억을, ‘책상에 탁’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당시 국가폭력의 은폐를 떠올리게 했다. 논란이 커지자 스타벅스는 행사를 중단하고 사과했지만, 이미 문제는 단순한 문구 실수를 넘어섰다. 한국 사회가 지켜온 민주주의의 기억을 대기업 마케팅이 얼마나 가볍게 지나쳤는가라는 질문이 남았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5월 26일 대국민 사과를 했다. 스타벅스코리아 대표 해임과 자체 진상조사도 뒤따랐다. 그러나 사과 이후에도 여론이 쉽게 가라앉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신세계 측 설명대로 고의성이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재라인 누구도 문제를 감지하지 못했고 일부 결재는 첨부파일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이뤄졌다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악의의 증거라기보다 더 무서운 무감각의 증거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쉬운 반응은 분노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방향 있는 분노다. 시민들이 스타벅스를 불매하는 것은 정당한 선택일 수 있다. 역사적 상처를 가볍게 다룬 기업에 소비자로서 항의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가능한 시민적 표현이다. 하지만 스타벅스를 이용하는 평범한 시민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누군가는 사건을 충분히 알지 못했을 수 있고, 누군가는 선물 받은 쿠폰을 쓰고 있을 수 있으며, 누군가는 출근길에 가장 가까운 카페가 그곳일 수 있다. 그 사람들을 향해 “아직도 거길 가느냐”고 몰아붙이는 순간, 비판의 화살은 책임 있는 기업 권력에서 생활 속 개인에게 잘못 옮겨간다.
불매는 권리지만, 낙인은 폭력이다. 이것이 이번 사태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경계선이다. 우리가 물어야 할 대상은 매장에 앉아 있는 손님이 아니다. “왜 그 문구가 기획됐는가”, “왜 아무도 멈추지 않았는가”, “왜 결재라인은 역사적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는가”, “왜 사과 이후에도 재발방지책은 충분히 보이지 않는가”이다. 시민끼리 서로를 심판하기 시작하면 기업은 시간을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시민들이 서로를 공격하지 않고 같은 질문을 기업에 던질 때, 사태는 비로소 사회적 변화의 계기가 된다.

인류 최고의 철학자들이라면 어떤 해법을 내놓았을까?
흥미롭게도 동서양의 가장 깊은 전통들은 이 문제에서 거의 같은 곳으로 수렴한다.
진실 → 인정 → 책임 → 회복 → (그제서야) 화해가 성립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라면 이 사태를 두 개념으로 풀었을 것이다. 인간이 과거의 돌이킬 수 없음(irreversibility)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용서’이고, 미래의 예측 불가능성에서 벗어나는 길은 ‘약속’이다. 그런데 용서는 가해자가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피해자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정 회장은 용서를 구하면서 동시에 화해를 선포하는 모순을 범했다. 더 날카로운 건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다. 신세계 스스로 “마케팅 시안이 담긴 메일 첨부파일조차 열지 않고 관행적으로 승인했다”고 인정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아렌트가 말한 ‘사유의 부재’다. 고의가 없었다는 항변은 면죄부가 아니라 오히려 더 무거운 진단이다 —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이런 일이 통과됐다는 뜻이니까.

공자라면 ‘正名(정명)’, 이름을 바로 세우라 했을 것이다. ‘탱크데이’는 이름의 타락 그 자체다. 그리고 그는 “過則勿憚改(과즉물탄개)” — 잘못했으면 고치기를 두려워 말라 — 고 했다. 핵심은 변명 없이 즉시, 철저히 고치는 것이지 책임의 소재를 따져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맹자는 더 직설적으로 말했을 듯 싶다. 측은지심(타인의 고통에 아파하는 마음)과 수오지심(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타인의 비극으로 물건을 판 행위,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사과 — 맹자라면 바로 이 ‘수오지심의 결여’를 지적했을 것이다.
칸트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했다. 5·18 희생자의 고통을 마케팅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 잘못의 본질이고, 따라서 회복도 같은 자리에서 — 희생자들을 목적으로 다시 세우는 것에서 — 시작돼야 한다.
아리스토텔리스의 관점에서 하루짜리 기자회견과 사과문은 출구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되새기면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반복해서 행하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탁월함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이다.”
과거 패션 플랫폼 무신사가 역사 왜곡 논란 이후 박종철기념사업회를 찾아가 수년째 진정성 있는 후원과 관계를 이어가며 신뢰를 회복했듯, 신세계와 스타벅스는 역사적 상처를 보듬는 구체적인 행동을 ‘시간의 축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말이 아닌 지속적인 사회적 책임(CSR) 시스템의 안착만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진정한 사죄의 완성이다.

따라서 이 사태의 출구는 세 가지 극단을 피해야 한다.
첫째, “사과했으니 끝났다”는 기업 편의적 봉합은 안 된다. 둘째, 실체 규명 없이 분노만 확대해 무기한 불매와 퇴출 요구로 가는 것도 사회적 해법은 아니다. 셋째, 실무자 몇 명에게만 책임을 떠넘기는 ‘꼬리 자르기’도 안 된다. 이미 대표이사 해임과 관련 임직원 징계 절차가 진행됐지만, 시민사회에서는 사과와 인사조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비판이 계속 나오고 있다. 참여연대는 선불충전금 전액 환불과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필요성을 제기했다.
가장 바람직한 마무리는 징벌이 아니라 회복적 책임이어야 한다. 신세계와 스타벅스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독립적인 진상검증이다. 회사 내부 감사만으로는 이미 한계가 드러났다. 5·18 관련 단체, 박종철기념사업회, 소비자단체, 기업윤리 전문가, 노동자 대표, 외부 법률가가 참여하는 독립 검증위원회를 구성해 기획·검토·승인·게시·수정·삭제 전 과정을 공개해야 한다. 목적은 누군가를 마녀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왜 4단계 결재라인이 모두 침묵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소비자 선택권 보장이다. 선불충전금 환불 요구는 단순한 돈 문제가 아니다. 소비자가 더 이상 해당 브랜드를 이용하지 않겠다고 판단할 자유를 보장하라는 요구다. 법적 약관만 앞세우지 말고, 일정 기간 미사용 충전금에 대해 조건 없는 환불 창구를 열어야 한다. 이것은 기업이 “불매할 자유”까지 존중한다는 신호가 될 수 있다.
세 번째는 기억 회복 프로그램이다. 다만 여기서도 조심해야 한다. 스타벅스가 5·18 이름을 내건 할인행사나 보여주기식 기부를 하면 또 다른 소비화가 된다. 필요한 것은 조용하고 장기적인 지원이다. 5·18과 6월항쟁 관련 교육자료 제작, 청소년 역사교육 지원, 매장 직원 대상 역사·인권 리스크 교육, 광고·마케팅 사전 검토 체계 구축이 더 적절하다. 특히 모든 프로모션에 ‘역사·사회적 맥락 검토’ 절차를 넣고, 특정 기념일과 문구가 충돌할 경우 자동으로 보류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네 번째는 오너 리스크의 제도화된 통제다. 이번 사건은 특정 문구 하나의 사고이면서 동시에 정용진 회장의 과거 정치적 이미지와 결합해 증폭됐다. 그래서 출구는 “회장이 한 번 더 고개 숙이는 것”이 아니라, 총수 개인의 언행과 기업 브랜드가 충돌하지 않도록 이사회 차원의 윤리·리스크 관리 장치를 만드는 데 있다. 회장의 사과는 출발점일 뿐, 신뢰 회복은 지배구조의 변화로 증명돼야 한다.
결국 철학적 해법은 하나로 모인다. 용서는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사회가 판단하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기업이 할 일은 “용서해달라”고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가 가능해질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독립조사, 전액 환불 선택권, 장기 역사교육, 결재 시스템 개혁, 오너 리스크 통제. 이 다섯 가지가 실행될 때 비로소 이 사태는 한국사회에 남는 교훈이 될 수 있다.
이번 사태의 가장 좋은 출구는 스타벅스가 다시 조용히 장사를 잘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모든 기업이 “역사는 마케팅 소재가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이라는 기준을 새기는 것이다. 그렇게 마무리된다면, 이 사건은 부끄러운 사고로만 남지 않고 기업윤리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