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합창 너머, 네 겹의 시선이 필요한 이유
2026년 5월 18일 오전 10시, 광주민주화운동 46주년 기념식이 진행되던 그 시간. 스타벅스코리아 앱과 홈페이지에는 한 장의 홍보물이 올라왔다. ‘단테·탱크·나수데이’ 텀블러 프로모션 페이지에 ‘5/18’이라는 날짜와 ‘탱크데이’,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로부터 30시간이 지나는 동안 스타벅스코리아 대표는 해임됐고,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으며, 미국 본사까지 별도로 고개를 숙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SNS에 “대한민국 공동체와 기본적 인권, 민주의 가치를 부정하는 이런 저질 장사치의 비인간적 막장 행태에 분노한다”고 적었다.

표면적 분노 아래에는 한국 사회의 깊은 단층이 자리하고 있다. 이 사태는 적어도 네 겹의 시선으로 읽혀야 한다. 기업의 검수 시스템이 어떻게 무너졌는가라는 시스템 층위, 광주의 기억이 다음 세대에게 어떤 모습으로 도달하고 있는가라는 세대 문화의 층위, 한 사기업의 일탈이 왜 이렇게 큰 정치적 사건이 되었는가라는 정치 층위, 그리고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분노하고 있는가라는 자기성찰의 층위다. 한 층위만 보면, 다른 층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더 중요한 일을 놓치게 된다.
사건의 해부 — 표면의 두 문구와 그 너머의 정황
문제가 된 표현은 일차적으로 두 개였다. 5월 18일 자체를 ‘탱크데이’로 명명하고 ‘탱크 시리즈’ 텀블러를 판매한 것, 그리고 ‘책상에 탁!’이라는 슬로건. 전자는 광주에 진입한 계엄군 탱크의 기억을 정면으로 건드린다. 후자는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당시 치안본부장의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악명 높은 은폐 발언을 즉각 환기한다.

만약 둘 중 하나만 있었다면 우연으로 변호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둘이 5월 18일이라는 날짜와 함께 한 페이지에 모인 순간, 이것은 통계적 우연의 범주를 벗어난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무거운 트라우마 둘을 정밀하게 타격한 것이다.
논란이 확산되자 누리꾼들은 추가 정황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행사 제품 중 ‘컬러풀 탱크 텀블러 세트’의 용량이 박근혜 전 대통령 수인번호와 같은 503㎖라는 점, 같은 ‘탱크’ 라인의 미니 텀블러(133㎖) 출시 기념 ‘미니 탱크데이’ 행사가 세월호 참사일인 4월 16일에 진행됐다는 점, 텀블러가 6가지 색상으로 출시됐다는 점 등이 잇따라 거론됐다. 헤럴드경제 등 일부 매체는 스타벅스 공식 홈페이지에서 4월 16일 미니 탱크데이의 흔적을 확인했다.
다만 이 정황들은 신중하게 다뤄져야 한다. 503㎖에 대해 스타벅스코리아는 “제품명과 용량은 글로벌 텀블러 개발업체가 정한 공통 규격이며 국내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탱크’ 라인 자체는 이번 이벤트를 위해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상시 판매 중인 기존 제품군이다. 4월 16일 행사 역시 당시에는 ‘탱크-세월호’의 연결고리가 가시화되지 않아 논란이 일지 않았다. 6가지 색상을 두고 “전두환의 6공화국 연상”이라는 해석이 일부에서 나왔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부정확하다. 전두환 정권은 제5공화국(1981–1988)이고, 제6공화국은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시작된 민주화 이후의 체제다.

이런 신중함을 전제하더라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표면의 두 문구만으로도 이 사태는 우연의 영역을 벗어난다. 그리고 그 두 문구가 어떻게 검수의 그물을 모두 빠져나갔는가 — 거기에 진짜 문제가 있다.
지배적 해석 — ‘의도’와 ‘제도화된 무감각’ 사이
여론과 정치권의 다수 해석은 분명하다. 이것이 단순한 실수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근거는 세 가지 층위에서 모인다.
첫째, 검수 구조의 문제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실무 사원이 문구를 만들 수는 있어도 실제 행사 배포와 노출까지 가려면 최소 팀장 이상 검토가 들어간다”며 “특히 전국 브랜드에서 민감한 표현이 걸러지지 않았다는 건 검수 체계 자체 문제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대리급 한 명이 만든 초안이 그대로 노출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디선가 누군가는 이 조합을 보고 OK 사인을 줬다.
둘째, 모기업의 정치적 이력이다. 김성식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은 페이스북에 “정 회장의 작품이 아니라면, 정 회장의 ‘멸콩’ 파문, 세월호 방명록 문구 조롱, MAGA 네트워크 등을 보아온 회사 간부들의 정신세계가 아예 그렇게 바뀌어 있는 것인가”라며 “유사한 언행이 한두 번도 아니”라고 지적했다. 정용진 회장의 과거 행보는 그 자체로 죄가 되지는 않지만, 조직 내부에 “특정 방향의 역사 도발은 어느 정도 용인된다”는 안일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최고경영자의 편향된 역사관이 조직 문화에 스며들어 실무자들의 자기 검열 기능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이른바 ‘제도화된 무감각’이다.
셋째, ‘책상에 탁’의 특이성이다. ‘탱크’는 일반명사다. 5·18을 모르고도 쓸 수 있다. 그러나 ‘책상에 탁’은 다르다. 박종철 사건의 그 발언을 모르는 사람은 이 표현 자체를 떠올리지 않는다. 안다면,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안다. 이 문구가 5/18과 함께 등장한 이상, 단순한 무지의 산물이라는 변호는 설득력을 잃는다.
결국 사태의 본질은 한 사람의 악의냐 아니냐를 가르는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다. ‘의도된 조롱’과 ‘제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검수 시스템’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둘은 같은 토양에서 함께 자란다.

다른 시선 — 역사의 콘텐츠화와 MZ세대의 문화적 시차
그럼에도 한 가지 가설은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다. MZ세대 기획자가 이 캠페인의 어떤 단계에 관여했다면, 그들의 머릿속에서 ‘탱크’와 ‘5·18’의 결합이 어떤 의미였을까 하는 질문이다.
2023년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동원한 이후, 12·12와 5·18 시기의 군사적 이미지 — 탱크, 계엄군, 군복 — 는 한국 대중문화의 어휘 속으로 더 깊이 들어왔다. 문제는 그 진입이 ‘경건한 추모’로서가 아니라 ‘소비 가능한 콘텐츠’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젊은 세대에게 군사 독재기의 상징은 직접 경험한 트라우마가 아니라 영화·드라마·유튜브·밈을 통해 가상으로 재구성된 시각적 오브제에 가깝다. 영화 속 빌런의 대사는 패러디의 소재가 되고, 탱크는 강력한 성능을 상징하는 ‘멋진 기계’로 치환된다. 이른바 ‘역사의 미학화’ 혹은 ‘탈맥락화’다. 역사적 실재가 가졌던 무게는 휘발되고, 자극적인 시각적 표면과 도파민을 자극하는 ‘바이브’만 남는다.
기성세대의 역사관과 MZ세대의 역사관 사이에는 이렇게 깊은 인식의 층위 차이가 존재한다. 한쪽에서 ‘탱크’는 국가폭력의 공포스러운 기표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강렬한 시각적 오브제다. 한쪽에서 5·18은 부채 의식과 엄숙한 추모의 대상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콘텐츠로 재구성된 역사적 사건이다. 한쪽에서는 성역과 금기가 있는 경계의 언어가 작동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극을 위해 무엇이든 차용하는 해체적 언어가 작동한다. 이 두 인식 시스템이 한 조직의 검수 라인 안에서 마주칠 때, 누군가는 ‘엣지 있는 카피’라고 본 것을 누군가는 ‘폭력적 조롱’으로 본다.
이 시차를 인정하면, ‘Tank’ 텀블러가 이미 존재하는 상품군이었고 누군가 단순히 ‘5월 이벤트’ 일정에 18일을 끼워 넣었을 가능성, 그리고 ‘책상에 탁’은 별도 카피라이팅 라인에서 운율을 맞춘 슬로건으로 제안됐을 가능성, 그리고 통합 검수 단계에서 누구도 이 조합의 무게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정직해야 한다. 이 가설은 ‘탱크’의 등장은 설명할 수 있지만 ‘책상에 탁’은 설명하지 못한다. 이 표현은 영화나 대중 콘텐츠에 흔히 등장하는 시각 기호가 아니라, 박종철 사건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만 의미를 갖는 언어다. 그것을 끌어와 사용한 사람은, 무엇을 끌어왔는지 모를 가능성이 매우 낮다. ‘MZ세대 문화적 시차론’은 사태 일부의 발생 경로를 설명할 수 있는 보조 가설이지, 전체를 면책하는 주장이 아니다.
그러나 보조 가설로서의 가치는 분명하다. 검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이유, 사후에 단어 몇 개만 바꾸면 된다고 판단한 이유, 초기 사과문이 220자에 그친 이유 — 이 모든 것의 배경에 세대 간 역사 감수성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은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5·18을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가에 대한 거울이기도 하다.

도파민 마케팅과 시스템의 침묵
기업 조직의 작동 원리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현대의 마케팅 부서는 클릭 수, 노출량, 화제성 같은 정량 지표로 평가된다. ‘엣지 있는 카피’와 ‘자극적 후킹’이 곧 성과로 환산되는 환경에서, ‘이 표현이 누군가에게 어떤 상처를 줄 수 있는가’라는 윤리적 질문은 KPI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른바 ‘도파민 중심주의’가 마케팅 부서의 의사결정 회로를 지배할 때, 역사적·사회적 리스크는 시스템의 사각지대로 미끄러진다.
여기에 모기업 총수의 정치적 이력이 더해지면, ‘제도화된 무감각’은 한층 견고해진다. 최고경영자가 사적으로 어떤 정치적 발언을 반복하는지가 실무자들의 자기 검열 임계점을 결정한다. “이 정도는 회사가 받아 줄 것”이라는 학습된 감각이 조직 깊숙이 자리잡을 때, 외부에서는 도무지 통과될 수 없어 보이는 표현이 내부에서는 부드럽게 흘러간다.
이번 사태에서 단어 몇 개를 바꾸는 것으로 진화하려 한 초기 대응, 그리고 5·18과의 연관성을 사과문에 명시하지 않은 1차 사과문은 이 진단의 강력한 방증이다. 그들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적어도 그 시점까지는,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정치적 의미부여의 비용
이재명 정부의 강경 대응은 정치적으로 자연스럽다. 5·18은 현 집권세력의 정체성과 직결된 사건이고, 이를 모독하는 행위에 단호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정용진 회장의 신속한 사과와 책임자 해임은 마땅한 수순이다.
그러나 한 가지 우려는 짚어둘 만하다. 대통령이 SNS에 직접 ‘저질 장사치’라는 표현을 쓰고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도덕적, 행정적, 법적, 정치적 책임이 주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통령직의 무게로 한 사기업의 처분 방향을 사실상 지시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는 두 가지 위험을 안고 있다.
첫째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축 효과(chilling effect)다. 민간 기업의 무감각이나 안일을 ‘체제 도전’으로 격상시켜 사법적·행정적 처벌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면, 다음 번 마케팅 기획자는 ‘광주’, ‘5월’, ‘탱크’ 같은 단어를 아예 회피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것은 역사 감수성의 함양이 아니라 단순한 침묵이다. 광주를 기억하는 것과 광주를 회피하는 것은 다르다. 정치적 압력은 후자를 강제할 수 있다.
둘째는 사실관계와 규정 사이의 시차다. 만약 향후 신세계그룹의 자체 조사에서 이번 사태가 조직적 의도가 아닌 검수 시스템의 총체적 마비로 결론날 경우, ‘저질 장사치의 비인간적 막장 행태’라는 정치적 규정은 어디로 가는가. 의도와 무능은 도덕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다른 무게를 갖는다. 강한 규정이 사실관계 확정보다 앞서 갈 때, 그 규정은 시간이 지나며 정치적 부담으로 되돌아오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더해 짚어야 할 점은, 정치권력이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강도가 강할수록 사건의 해석 공간이 좁아진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이번 사태에서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 — ‘대기업의 역사 감수성 검수 시스템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5·18의 기억을 다음 세대에 어떻게 살아 있게 할 것인가’ — 은 ‘의도된 모독이냐 아니냐’라는 이분법적 논쟁에 쉽게 묻혀버린다. 분노의 정당함과 분석의 정밀함은 양립해야 하는데, 정치적 의미부여가 강할수록 둘의 간격은 벌어진다.

결론 — 분노에서 분석으로
이 사태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다. 5·18을 모독하는 마케팅이 대기업에서 노출됐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사회가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강력한 응징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분노가 분석을 대체할 수는 없다.
이 사건은 한 사람의 악의로 환원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기업의 정치적 이력, 검수 시스템의 마비, KPI 중심의 도파민 마케팅, 세대 간 역사 감수성의 격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해석하는 정치권력의 시선이 함께 작용한다. 하나의 층위만 보면, 다른 층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더 중요한 일을 놓친다.
기업이 배워야 할 것은 ‘다음에는 5월에 탱크라는 단어를 쓰지 말자’가 아니다. ‘우리 조직이 한국 현대사의 어떤 지점들을 더 이상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마비의 구조는 무엇인가’다. 마케팅 검수 라인에 역사·사회적 리스크를 자문할 수 있는 외부 전문가가 상설로 결합되어야 하고, 임직원 교육은 단순한 사건 암기가 아니라 트라우마에 대한 공감을 함양하는 방향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사회가 점검해야 할 것은 ‘누구를 더 강하게 처벌할 것인가’가 아니다. ‘5·18의 의미가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전달의 실패가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가’다. 〈서울의 봄〉이 만든 시각적 친숙함을 어떻게 역사적 무게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줄 것인가의 문제다.
정치권이 경계해야 할 것은 ‘사건의 의미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유혹’이다. 의미부여가 사실관계보다 앞서갈 때, 정의는 정쟁이 되고 광주의 기억은 진영의 깃발이 된다. 5·18은 어느 정파의 자산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성역이어야 하며, 성역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정치적 무기로 다루지 않는 것이다.
역사의 무게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에 따라 공동체의 뿌리가 되기도 하고 흉기가 되기도 한다. 분노의 정당함과 분석의 정밀함이 함께 갈 때, 이번 사태는 한국 사회가 한 단계 성숙해지는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스타벅스 ‘탱크데이’는 커피 한 잔의 실수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과거와 현재, 세대와 이념 사이에서 여전히 불안정한 균형 위에 서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이 논란이 단순 공분으로 끝나지 않고, 다각적 이해와 자기반성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역사적 상처를 존중하면서 미래로 나아가는 성숙한 민주주의로 한 걸음 나아가는 기회가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