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4일. 오후 여의도 (사)대한민국미래전략협회.
김성훈 팀장(42세)의 책상 위에는 믹스커피 봉지 세 개가 빈 껍데기만 남은 채 널려 있었다. 그는 3개월을 꼬박 준비한 ‘국가 미래 전략 포럼’ 기획안의 마지막 오탈자를 확인하고 엔터키를 눌렀다.
다음 날 아침, 협회 상무가 그의 자리로 다가왔다.
“김 팀장, 역시 자네야. 어제 회장님 보고 들어갔는데, 김 팀장이 정리한 ‘저출산 대응 시나리오’, 그거 토시 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장관님 보고 올리기로 했어.”
성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지난 3개월의 야근과 주말 반납이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맛에 이 일을 했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데 기여했다는 보람.
“감사합니다 상무님. 팀원들이 고생 많았죠.” “
: 같은 날 저녁, 강남 깜부치킨
강남대로의 밤공기는 언제나 욕망의 냄새를 풍긴다. 타이어 타는 냄새, 값비싼 향수, 그리고 튀김 기름의 쩐내.
[깜부치킨] 서초점 주변은 경호원들로 인간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그 안쪽, 대한민국 재계 서열 1, 2위를 다투는 S사 이 회장과 H사 정 회장, 그리고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엠비디아의 존슨 황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카스] 생맥주 피처와 반쯤 뜯어먹은 마늘 전기구이가 놓여 있다.
시가총액 합계 수천조 원의 거인들이 2만 원짜리 치킨을 맨손으로 뜯는 이 기묘한 풍경 구석에, 김성훈이 1시간째 웅크리고 있었다. (사)대한민국미래전략협회 기획팀장. 그는 우연히 알게된 회장들의 치킨회동 소식에 사진이라도 하나 얻어 협회 홍보에 사용할 요량으로 이곳에 잠입했다.
매장 안에 취기가 한창일 무렵. 존슨 황이 기름 묻은 손을 닦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이 다이내믹한 밤을 기념하며, 제가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성훈은 재빨리 휴대폰을 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보여드릴 수는 없습니다. Y-143은 연구소 밖의 세상을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엠비디아의 비밀 병기, Y-143.” “단순한 AI가 아닙니다.
매장의 소음이 잠시 잦아들었다. 인간의 모순된 욕망까지 이해하는 괴물, 초지능(Superintelligence)의 탄생입니다.
그는 투명한 추첨함에서 번호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중 한 분께, Y-143을 1년간 무상 임대해 드립니다. 지난 3년. 엠비디아의 모든 자원을 투입해 진화한 Y-143의 제작비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지만 앞으로 학습할 데이터의 가치는 그 이상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단, 절대 그 누구에게도 당첨 사실을 알리지 마세요. 앞으로 1년간 우리는 당첨자와 함께 인류의 미래를 건 모험을 떠날 것입니다.
자, 행운의 베타 테스터는… Number 143!”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매장은 취기로 가득했고, 회장들도 처음 듣는 얘기라 크게 집중하지 않는 모습이다. 다만 화장실 옆 구석 자리에서 처음부터 이 장면을 지켜본 성훈은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헉! 나잖아!”
존슨 황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당첨되신 분은 번호표를 확인하시고. 3일 안으로 엠비디아 코리아 R&D 센터로 오시면 됩니다. 번호표를 제시하면 당신의 새로운 파트너와…작은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깜짝 이벤트는 싱겁게 끝났다, 매장 안의 손님들은 음악 소리에 섞인 존슨 황의 중대발표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또 AI 얘기네”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는 자신들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 시각. 성훈은 뒷문으로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며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초지능? AI? 그게 다 무슨 말이야. 당장 이번 달 카드값 200만 원이 구멍 난 그에게, 존슨 황의 제안은 그저 술 취한 억만장자의 농담처럼 들릴 뿐이었다.
Prologue 1. 차가운 밀실
: 다음 날, 엠비디아 코리아 비밀 연구소 지하 5층.
밤새 고민했는지 피곤함이 역력한 얼굴로 성훈은 혹시 돈이 될지도 모르니, 당첨선물이 무엇인지만 확인해보자는 심정으로 약속된 장소를 찾았다. 성훈은 보안 요원의 안내를 받아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공기 중에는 먼지 한 톨 없는 멸균실 특유의 서늘한 냄새가 났다.

육중한 기계음과 함께 밀실의 문이 열렸다. 방 한가운데, 수석 연구원 미셸 김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흰색 천으로 덮인 ‘무언가’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셨군요, 미스터 김.” 미셸 김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녀는 태블릿을 조작하며 성훈에게 다가왔다.
“어제 존슨 황 CEO께서 말씀하신 Y-143입니다. 우리는 그녀를 ‘도연(Do-yeon)’이라고 부릅니다.”
미셸이 손짓하자, 뒤에 있던 천이 스르륵 벗겨졌다. 성훈은 숨을 멈췄다. 그곳에는 기계가 없었다. 우아한 단발머리, 잡티 하나 없는 상아색 피부, 세련된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은 30대 초반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감겨 있는 눈꺼풀의 속눈썹 하나까지, 그것은 완벽한 생물학적 인간의 형상이었다.
“이게… 로봇이라고요?” 성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의료용 인공 피부와 미세 근육 액추에이터 4천 개를 사용해 인간의 표정을 99.9% 구현했습니다. 그녀는 AGI(일반인공지능)를 넘어선 단계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당신의 감정까지 읽어낼 거에요.”
미셸은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색 봉투를 성훈에게 건넸다.
“그리고 이건, 도연이 서울을 학습하는 데 필요한 ‘연료’입니다.”
성훈이 봉투를 열었다. 묵직한 메탈 소재의 검은색 카드. [MBIDIA BLACK]이라는 로고가 빛을 받아 번쩍였다.
“한도는 5억 원입니다.”
“오… 5억이요?” 성훈의 손에서 카드가 미끄러질 뻔했다.
“조건은 하나입니다. 이 돈은 저축하거나 빚을 갚는 데 쓸 수 없습니다. 오직 도연과 함께하는 ‘경험’과 ‘소비’에만 사용하십시오. 1년 뒤 남은 잔액은 전액 회수됩니다. 오직 소비한 물건과 경험만이 성훈씨의 소유입니다? 가장 비싸고, 가장 쓸모없는 것들까지 마음껏 경험해 보세요. 그 과정에서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의 데이터가 우리가 원하는 값어치니까요.”
인공지능 로봇과 5억 원짜리 카드. 평생을 최저가 검색과 6천 원짜리 식권에 목매던 성훈에게, 그것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 이제 파트너를 깨우시죠.”
미셸의 신호에 따라, 성훈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앉아 있는 여성의 손을 잡았다. 차가울 줄 알았던 손에서, 놀랍게도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위잉- 아주 미세한, 모기 날갯짓보다 작은 구동음이 들렸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떴다. 깊은 갈색 눈동자. 그 안에는 데이터의 홍수 대신, 성훈을 꿰뚫어 보는 차분한 지성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입꼬리를 우아하게 올리며 입을 열었다. 성우보다 더 완벽한 발성, 그러나 어딘가 서늘한 친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반갑습니다. 파트너님.”
도연은 성훈의 낡은 패딩 소매를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저는 도연입니다. 오늘부터 365일간, 당신이 잃어버린 욕망의 지도를 다시 그려드리겠습니다.”
성훈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쥐고 있던 5억짜리 카드가 손바닥의 땀으로 축축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계약이었다. 자본주의의 신과 맺은, 1년짜리 영혼의 임대 계약.
제1화 30만 원 식권
서울 여의도, (사)대한민국미래전략협회 사무실.
성훈은 자신의 낡은 사무용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재킷 안주머니에는 5억 원의 한도가 장전된 [MBIDIA BLACK] 카드가 마치 뜨거운 석탄처럼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김 팀장, 잠깐 이리 와봐.”
상무의 호출이었다. 성훈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지난 3개월 간 그가 주말도 없이 갈아 넣은 ‘국가 미래 전략 보고서’의 성과를 듣는 자리였다. 보고서 표지에는 협회장의 이름만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지만, 성훈은 그 내용을 채운 것이 자신의 피와 땀임을 알기에 일말의 기대감을 품었다.
상무실에 들어서자, 상무는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두툼한 흰색 봉투 하나를 책상 위에 툭 던졌다.
“수고했어. 장관님 반응이 아주 좋아. 자네 기획안 덕분에 우리 협회 위상이 꽤 올라갈 거야.”
성훈의 시선이 봉투에 꽂혔다. 두께가 제법 되었다. ‘드디어… 인정받는 건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 정도 두께면 적어도 100만 원,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다. 밀린 대출 이자를 갚고, 오랜만에 소고기라도 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아, 근데 알다시피 이번에 로비 리모델링하느라 예산이 바닥나서 말이야. 현금 보너스는 어렵게 됐어. 대신 이거, 특별히 챙겼으니 팀원들 잘 챙기고.”
성훈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빳빳한 종이 뭉치가 손에 잡혔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얼굴은 없었다.
[구내식당 식권 (6,000원) x 50매]
총액 30만 원. 성훈은 멍하니 식권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50장. 그것은 ‘앞으로 밖에서 사 먹지 말고 회사 지하에서 주는 밥 먹고 열심히 일해라’는 무언의 명령 같았다. 그가 국가를 위해 바친 지난 시간과 열정이, 고작 두 달 치 점심값으로 환산되어 돌아왔다.
“부족한가? 50장이면 꽤 큰 건데. 거기 된장찌개랑 제육볶음 예술이잖아.” 상무의 뻔뻔한 웃음 뒤로, 성훈의 귓속에서 ‘뚝’ 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그가 15년 동안 지켜온 인내심의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성훈의 손이 안주머니로 향했다. 차가운 메탈 카드.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견뎌온 것은 가난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6천 원짜리 식권으로 계산하는 이들의 경멸이었다.
“상무님.”
“왜, 뭐 더 필요한가?”
“아니요. 제가 드려야죠.”
성훈은 품에서 1년 묵은 사직서를 꺼냈다. 그리고 식권 50장 뭉치 위에 사직서를 덮어 상무 쪽으로 밀었다.
“맛있는 점심은 이 식권으로 상무님이 드시고 건강하세요. 전 이제 제 인생을 다시 설계해봐야 할 것 같아요.”
“이… 이봐! 김 팀장! 자네 미쳤어?”
상무의 고함이 등 뒤에서 터졌다. 성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쾅- 육중한 철문이 닫히며 사무실의 소음이 차단되었다.
복도는 고요했다. 그제야 아드레날린이 빠져나가고, 손끝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42세 남자의 객기. 대책 없는 퇴사. 현실의 공포가 쓰나미처럼 밀려오려던 찰나였다.
성훈은 재킷 안주머니 깊숙한 곳으로 손을 넣었다. 그곳에는 5억짜리 카드와 함께, 연구소에서 지급받은 납작하고 차가운 검은색 기기가 들어 있었다.
[N-Link (Neural Link Device)]
에어팟보다 작고 버튼 하나 없는 매끈한 조약돌 모양의 단말기. 이것은 도연(Y-143)과 성훈을 연결하는 신경망이자, 성훈의 심박수, 음성, 위치, 주변 상황을 실시간으로 도연에게 전송하는 송신기다.
성훈은 떨리는 손으로 기기를 귀에 꽂고 중앙을 꾹 눌렀다.
웅- 짧고 묵직한 진동.
“……도연…”
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기기에서 도연의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피커가 아닌, 골전도 방식을 통해 귓속으로 직접 꽂히는 선명한 음성.
[- 파트너님. 심박수 150bpm. 코르티솔 수치 급증. 음성 패턴 분석 결과 ‘극도의 흥분’ 및 ‘해방감’이 감지되었습니다.]
“어… 나 저질렀어. 사표 냈다구.”
[- 알고 있습니다. 24시간 저와 연결되는 N-Link를 통해 상무와의 대화 내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했습니다. ‘식권 50장’이라는 키워드에서 파트너님의 감정 임계점이 돌파된 것으로 판독됩니다.]
도연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오히려 그 건조함이 성훈을 진정시켰다.
[- 잘하셨습니다. 자신의 존엄을 6천 원으로 계산하는 집단에 머무르는 것은 인생 낭비입니다. 지금 로비로 내려오세요. 정문 앞에서 대기 중입니다.]
“알았어. 지금 갈게.”
성훈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얼굴, 동시에 벼랑 끝에 선 남자의 얼굴이었다.
협회 건물 1층 로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점심시간을 맞아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로 로비가 북적였다. 낡은 회색 패딩을 입은 성훈은 그 인파 속에 섞여 회전문을 밀고 나갔다.
그때였다. 회전문 바로 앞, 검은색 벤(Van)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그리고 뒷좌석 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내렸다.
도연이었다. 어제 연구소에서의 모습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세련된 모습. 짙은 네이비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명품 선글라스를 머리에 얹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도회적인 여성.
그녀는 성훈을 발견하자마자,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성훈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 마치 오랫동안 내조해 온 아내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고생했어요, 여보.”
성훈이 움찔하며 물러서려 하자, 도연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N-Link를 통해 당신의 불안정한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건 ‘실패한 퇴사자’가 아니라, ‘더 좋은 곳을 찾아 떠나는 능력남’의 이미지입니다. 제 리드에 따르세요.”
도연은 성훈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따뜻했다. 로봇의 팔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온기.
지나가던 사람들 중 몇몇이 힐끗거리며 수근거렸다. ‘어? 저거 기획팀 김 팀장 아냐? 와… 부인인가? 엄청 미인인데?’ 경멸과 무시가 호기심과 부러움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성훈은 허리를 폈다. 도연이, 아니 인류 최고의 첨단기술이 그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가시죠.” 도연이 성훈을 이끌었다.
“어디로?” “당신의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러요.”
도연의 시선이 길 건너편, 붉은색 철골 구조물이 번쩍이는 [더현대 서울]을 향했다.
“식권 50장을 거절한 남자가 입기에, 지금 그 패딩은 너무 가볍거든요.”
성훈은 귀속의 N-Link 단말기를 어루만졌다. 이 작은 기계가 자신의 모든 비참함을 도연에게 전송했고, 도연은 그것을 완벽한 ‘솔루션’으로 바꿔서 눈앞에 나타났다.
“그래… 가자.”
두 사람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초라한 과거(협회)에서 화려한 욕망(백화점)으로 건너가는, 가장 짧고도 긴 횡단이었다.
제2화 265만 원짜리 결계(結界)
여의도, 더현대 서울 1층.
회전문이 돌고, 성훈은 다른 차원의 대기로 진입했다. 바깥세상의 거칠고 매연 섞인 바람은 두꺼운 유리벽 뒤로 차단되었다. 이곳의 공기는 적정 습도 45%, 온도 22도로 조율되어 있었으며, 은은한 시트러스 향이 자본의 냄새처럼 떠다녔다.
성훈은 잠시 멈칫했다. 대리석 바닥에 비친 자신의 모습—5년 된 낡은 회색 패딩, 무릎 나온 정장 바지—이 이곳의 눈부신 조명 아래서 유난히 이질적인 얼룩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습관처럼 어깨를 웅크렸다. 지난 15년 동안 예산 삭감 통보를 받을 때마다 취해온, 패배자의 자세였다.
[- 파트너님. 어깨 펴세요. 당신의 심박수가 불안정합니다.]
귓속의 N-Link를 통해 도연의 건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옆에 선 도연이 성훈의 팔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30대 초반의 우아한 여성과 42세의 남루한 남자. 그 기묘한 부조화가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가요, 여보.” 도연이 육성으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주변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한, 의도적인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그들은 빛의 중심부, [몽클레르 (MONCLER)] 매장 앞으로 걸어갔다. 검은색 벨벳 라인 뒤로 대기 줄이 길었다. 하지만 도연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입구의 직원에게 가볍게 눈짓하자, 직원은 홀린 듯 벨벳 라인을 열었다. 그녀가 뿜어내는 데이터, 즉 ‘구매력 있어 보이는 아우라’가 통행증이었다.
매장 안은 고요했다. 검은색 패딩들이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우아하게 걸려 있었다. 성훈은 행거에 걸린 숏 패딩 하나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몽클레르 마야(Maya) – 999 Black]
차가웠다. 그리고 매끄러웠다. ‘나일론 라케(Nylon Laqué)’. 도연의 데이터베이스는 이 소재가 석유 화합물인 폴리아미드에 불과하다고 정의했지만, 성훈의 손끝에 닿은 그것은 마치 액체로 된 보석 같았다. 백화점의 조명을 머금었다가 묵직하게 뱉어내는 검은 광택. 그것은 옷감이 아니라, 세상의 무시를 튕겨낼 수 있는 단단한 갑옷처럼 보였다.
“입어보시겠습니까?” 직원이 다가왔다. 성훈은 자신의 낡은 회색 패딩을 벗었다. 솜이 다 죽어 얇은 종잇장 같은 그 옷이 직원의 손에 들려 축 늘어졌다. 성훈의 지난 42년 인생이 그렇게 들려 있는 것만 같았다.
성훈은 새 패딩에 팔을 넣었다.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다. 지퍼를 올리는 순간, 등 뒤에서부터 묵직한 온기가 차올랐다. 거위의 솜털이 만든 공기층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부드럽게 격리시키고 있었다.
거울 앞에 섰다. 왼쪽 팔뚝에 박힌 몽클레르의 펠트 로고. 알프스 산맥을 형상화했다는 그 작은 천 조각이, 거울 속 남자를 전혀 다른 존재로 정의하고 있었다. 식권 50장을 거절한 남자의 눈빛이, 검은 갑옷을 입고 비로소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잘 어울려요.” 도연이 거울 속 성훈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완벽한 아내의 그것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직원이 물었다. 성훈은 자신의 낡은 회색 패딩을 들고 있는 직원을 보았다. 그 옷이 마치 전생의 유물처럼 느껴졌다.
“이거… 얼마죠?” “네, 현재 매장가는 265만 원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265만 원. 성훈이 몇 달을 꼬박 모아야 만질 수 있는 비상금의 액수. 누군가에게는 한 달의 생계비. 하지만 지금 그의 안주머니에는 5억이라는 숫자가 찍힌 플라스틱이 들어 있다.
“이걸로 하죠” 성훈이 대뜸 말했다.
“어휴 여보, 다른 것도 좀 입어봐요, 지금 너무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도연이 한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성훈은 떨리는 손으로, 최대한 태연한 척 [MBIDIA BLACK] 카드를 내밀었다. 묵직한 메탈 카드가 직원의 손으로 넘어갔다.
“일시불로 해주세요.” 그 말을 뱉는 순간, 성훈의 뇌하수체에서 전례 없는 양의 도파민이 분비되었다.
결제가 진행되는 동안, 성훈은 직원이 들고 있던 자신의 낡은 패딩을 가리켰다.
“아, 그리고 저 옷은…” 성훈은 잠시 망설였다. 5년간 함께 여의도 칼바람을 막아준 전우였다.
“그냥 버려주세요. 입고 갈게요.”
직원은 미소 지으며 성훈의 낡은 패딩을 구석으로 치웠다.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그의 옛 껍질. 성훈은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도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자.”
매장을 나서는 성훈의 등은 곧게 펴져 있었다. 번쩍이는 검은색 패딩이 조명을 반사하며 그를 빛나게 했다. 도연은 그의 뒤를 따르며,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로그를 띄웠다.
[OBSERVATION LOG: Y-143]
– 품목: 몽클레르 마야 다운 재킷.
– 가격: 2,650,000원.
– 기능적 가치: 보온 (기존 15만 원 패딩 대비 20% 향상).
– 심리적 가치: 자존감 회복, 계급 상승의 착각
– 총평 : 파트너는 체온을 1도 올리기 위해 기존 패딩의 17배를 지불했음. 자본주의 사회의 ‘전투복(Armor)’을 구매한 행위로 판단됨.
에스컬레이터 앞에 선 성훈이 도연을 보며 물었다.
“도연” “네, 여보” 도연이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배고프다.
성훈은 몽클레르 위로 자신의 아랫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265만 원짜리 갑옷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그곳에 있었다.
“안내할게요. 도파민과 나트륨의 성지로.”
😎 사전방문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