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체육고등학교 실내 수영장은 김포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방송사 카메라 몇 대가 풀사이드를 비추고 있었고, 관중석에는 대학과 실업팀 스카우터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선수들을 쫓고 있었다. 서울시 고등부 수영 선수권 대회. 이곳은 연말에 열리는 전국체전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다.
한서준의 이름이 남자 고등부 200미터 자유형 예선전 명단에 올랐을 때, 포세이돈 코치진 사이에서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VIP 관람석, 두꺼운 유리 너머에서 서도준은 태블릿 PC로 한서준의 프로필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포세이돈이 자랑하는 최고의 유망주, ‘메트로놈’ 최정혁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최정혁은 데이터의 화신이었다. 그의 모든 레이스는 사전에 입력된 랩타임(lap time)과 스트로크 횟수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되었다. 감정의 기복도, 컨디션 난조도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 녀석이 네 결승 상대가 될 거다.” 서도준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데이터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지난 대회 기록은 운이 좋았을 뿐, 200미터는 100미터와 다릅니다. 후반부 페이스 조절 실패로 자멸할 확률 92%입니다.” 최정혁이 기계처럼 대답했다.
“그 8%의 변수를 없애는 게 네 임무다.” 서도준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최정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레이스를 하지 마라. 그냥 네게 입력된 대로, 58초. 58초. 정확히 두 번의 100미터 기록만 찍고 와. 저 녀석이 초반에 치고 나가든, 뒤처지든, 신경 쓰지 마. 유령에 홀려선 안돼.”
“명심하겠습니다.”
결승전. 서준은 가장자리인 1번 레인에 배정받았다. 중앙 레인에 비해 물살의 저항을 더 많이 받는, 가장 불리한 자리였다. 주진우의 입김이 닿지 않는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견제였다. 중앙 4번 레인에는 최정혁이 기계처럼 서 있었다.
출발대 뒤에서 주진우가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오늘 네 상대는 최정혁이 아니야. 네 몸뚱어리다.” 주진우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저항 낙하산을 기억해? 네 몸이 비명을 지르던 그 순간. 오늘은 그 브레이크를 네 머릿속에서 풀어주는 날이다.”
“어떻게 말입니까?”
“네거티브 스플릿(Negative Split). 그게 오늘 네가 할 일이다.”
주진우는 서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설명했다.
“수영 경기는 보통 전반 기록이 후반 기록보다 빨라. 체력이 떨어지니까. 하지만 진짜 괴물들은 반대로 해. 전반 100미터보다 후반 100미터를 더 빨리 들어오는 것. 그게 네거티브 스플릿이다. 초반에 힘을 비축하고, 상대가 지쳐갈 때 폭발시키는 가장 영리하고도 잔인한 전략이지. 훈련 때 낙하산을 달고도 레이스 페이스를 유지하려 했던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다. 네 몸은 이미 극한의 부하를 기억하고 있어. 낙하산이 없는 지금, 후반 100미터는 날아가는 기분일 거다.”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심장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삐-!
신호와 함께 8명의 선수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예상대로 최정혁은 완벽한 페이스로 선두를 치고 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레일 위를 달리는 열차 같았다.
하지만 서준은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힘을 빼고, 크고 부드러운 스트로크로 물을 탔다. 50미터, 75미터… 서준은 6위권까지 뒤처졌다. 관중석이 웅성거렸다. 김포 대회의 돌풍이 거품이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100미터 턴. 최정혁이 전광판에 정확히 58초 00을 찍고 턴을 했다. 서도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6위로 들어오던 서준이 턴을 했다.
주진우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59초 50.’ 합격이었다.
턴을 하는 순간, 서준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머릿속의 브레이크를 풀었다. 저항 낙하산의 묵직함이 사라진 몸이 얼마나 가벼운지, 그는 온몸으로 느꼈다.
“지금부터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서준의 스트로크 템포가 급격히 빨라졌다. 하지만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지옥 훈련으로 근육에 각인된 하이 엘보 캐치, 흔들림 없는 코어. 그의 몸이 하나의 거대한 엔진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다.
125미터 지점. 서준이 5위, 4위 선수를 차례로 집어삼켰다. 방송 중계석의 아나운서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 1번 레인! 1번 레인의 한서준 선수! 페이스가 엄청나게 올라옵니다!”
150미터 턴. 이제 그의 앞에는 단 두 명. 2위 선수와, 여전히 기계처럼 나아가는 선두 최정혁뿐이었다. 최정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옆 레인의 추격 따위는 데이터에 없는 변수였다. 그는 오직 자신의 페이스만 유지했다.
마지막 25미터. 서준이 마침내 최정혁의 옆에 따라붙었다. 메트로놈과 폭풍의 대결.
최정혁의 완벽한 자세에 처음으로 균열이 보였다. 예상치 못한 압박에 호흡이 흐트러지며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반면 서준은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폐 속의 산소, 근육 속의 글리코겐, 모든 것을 태워 추진력으로 바꾸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앞의 터치패드만 보였다.
두 선수의 팔이 거의 동시에 뻗어졌다. 수면 위로 거대한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터치.
수영장의 모든 소음이 멎었다. 모두가 전광판의 숫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4 LANE (최정혁): 1:55.89 1 LANE (한서준): 1:55.91
단 0.02초 차이. 최정혁의 승리였다.
VIP석의 서도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는 태블릿을 들어 한서준의 랩타임을 확인했다.
전반 100M: 59.52 / 후반 100M: 56.39
경이적인 네거티브 스플릿. 괴물 같은 기록이었다. 그는 이긴 것이 아니었다. 단지 간신히 막아냈을 뿐이다.
물 밖으로 나온 서준은 아쉬움에 숨을 골랐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온 주진우의 얼굴에는 패배의 그림자가 없었다.
“네가 이겼다.”
주진우는 서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기록은 졌지만, 싸움은 네가 이겼어. 오늘, 너는 저 메트로놈의 심장에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버그(bug)를 심어놓고 왔다.”
주진우의 말대로였다. 최정혁은 우승자 인터뷰도 거절한 채, 굳은 얼굴로 락커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처음으로 데이터로 설명할 수 없는 ‘변수’가 혼란스럽게 맴돌고 있었다.
서준은 졌지만, 서울 수영계는 그날 똑똑히 보았다. 시스템의 가장 완벽한 작품을 공포에 떨게 만든, 변방의 이름 없는 유령의 귀환을.
제9장: 바다의 황제
서울시 대회가 끝나고 며칠 뒤, 주진우는 서준에게 낡은 잡지 한 권을 던져주었다. 작년 전국체전 특집호였다. 표지에는 한 남자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포효하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다른 선수들은 마치 신하처럼 고개를 숙이거나 경외의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진 속 남자의 이름은 권시혁. 한국체대 3학년. 현 대한민국 남자 자유형의 절대강자. 그의 별명은 ‘마린 엠페러(Marine Emperor)’, 바다의 황제였다.
“최정혁은 잘 만들어진 기계지만, 저놈은 그냥 재앙 그 자체다.”
주진우가 사진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서도준이나 최정혁 같은 포세이돈의 수영은 ‘마이너스’의 수영이야. 저항을 줄이고, 실수를 줄이고, 변수를 줄여서 가장 이상적인 기록에 근접해 가는 방식이지.
하지만 권시혁은 달라. 저놈은 ‘플러스’의 수영을 해.”
“플러스의 수영이요?”
“그래. 보통 선수들은 물의 저항과 싸우지만, 저놈은 물의 힘을 이용할 줄 안다.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물의 미세한 흐름과 반동을 이용해 자신의 몸을 앞으로 쏘아 보내지. 힘으로 물을 밀어내는 게 아니라, 물이 자기를 밀어주게 만드는 거야. 10년 전… 내 아들 강호가 완성시키려 했던 경지가 바로 저거였다.”
주진우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패배감과 경외심이 동시에 묻어 나왔다.
“전국체전 200미터 자유형에 나간다. 가서 직접 봐라. 네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재능이 뭔지.”
그리고 한 달 뒤, 전국체전이 열리는 광주광역시의 주경기장 수영장.
한서준은 처음으로 느껴보는 압도적인 분위기에 숨을 죽였다. 수천 명의 관중, 화려한 조명, 그리고 풀사이드에 도열한 각 시도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권시혁이었다. 그는 다른 선수들처럼 긴장하며 몸을 푸는 대신, 헤드폰을 낀 채 가볍게 리듬을 타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경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
예선전. 서준은 권시혁과 바로 옆 레인에 배정받는 ‘행운’을 얻었다.
출발 신호가 울리고, 서준은 처음으로 권시혁의 수영을 바로 옆에서 목격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권시혁의 스트로크는 교과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자유자재로 변했다. 하지만 그의 몸 주변에는 신기할 정도로 물보라가 일지 않았다. 그의 몸이 지나간 자리는 마치 고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진 듯, 아름다운 파문만이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데드 포인트(Dead Point)’ 구간이었다.
“수영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 어딘줄 아나?” 주진우는 출발 전 서준에게 물었었다. “바로 150미터 지점이다. 신체에 쌓인 젖산이 최고조에 달하고, 산소 공급이 한계에 부딪히는 지점. 모든 선수의 속도가 뚝 떨어지는, 말 그대로 ‘죽음의 지점’이지. 네가 네거티브 스플릿으로 최정혁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놈이 그 데드 포인트에서 무너졌기 때문이다.”
서준은 150미터 턴을 하며 권시혁을 보았다. 다른 선수들의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서준 자신도 어깨가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그런데 권시혁은, 오히려 그 지점에서 더 빨라지고 있었다.
그는 지친 기색 없이, 오히려 더 가볍고 즐거운 표정으로 물을 타고 있었다. 마치 데드 포인트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여유롭게 1위로 터치패드를 찍었고, 기록은 자신의 최고 기록에 한참 못 미치는 설렁설렁한 페이스였다.
레이스가 끝나고, 서준은 거의 탈진한 상태로 숨을 몰아쉬었다. 권시혁은 그런 서준에게 다가와 씩 웃으며 말했다.
“너, 김포랑 서울에서 날아다닌다는 걔 맞지? 스트로크 좋던데? 근데… 너무 애쓴다.”
권시혁은 서준의 어깨를 툭 치고는 윙크를 날리고 사라졌다. ‘애쓴다’는 한마디. 그것은 칭찬도, 조롱도 아니었다. 절대강자가 발버둥 치는 도전자에게 보내는, 사실에 기반한 순수한 감상평. 서준은 그 한마디에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관중석으로 돌아온 서준에게 주진우가 물었다.
“이제 알겠나?” “…
네. 차원이 다릅니다.”
“저놈의 데드 포인트 극복법, 뭔지 알겠어?”
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주진우는 텅 빈 레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심장이다.”
“…심장이요?”
“그래. 저놈은 심장을 두 개 가진 것처럼 수영을 해. 레이스 중에 의도적으로 심박수를 떨어뜨렸다가, 필요할 때 다시 끌어올리는 훈련을 한 거다. 데드 포인트가 오기 전에 미리 심박수를 낮춰 젖산이 쌓이는 속도를 늦추고, 마지막 스퍼트 구간에서 다시 심장을 폭발시키는 거지. 이건 단순히 기술이나 근력의 문제가 아니야. 자신의 생체 리듬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경지다.”
주진우는 서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결승까지 남은 시간은 3시간. 그 시간 안에 너도 네 심장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물론, 저놈처럼은 안 되겠지. 하지만… 흉내라도 내야 해. 그러지 못하면 넌 저놈의 등에 생긴 물거품조차 구경하지 못할 거다.”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였다. 하지만 서준의 눈에는 두려움 대신, 알 수 없는 투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존재를 만났고, 그 존재가 사용하는 ‘재능’의 실체를 목격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뿐이었다.
제10장: 심장의 주인이 되라
결승전까지 남은 3시간. 주진우는 서준을 경기장 뒤편의 텅 빈 비상계단으로 데려갔다. 소음과 열기가 거짓말처럼 차단된, 차갑고 고요한 공간이었다.
“시간이 없다. 기술을 가르쳐 줄 수는 없어. 이건 기술이 아니라 감각의 영역이니까.”
주진우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눈을 감아봐. 그리고 네 심장 소리를 들어봐. 지금 미친 듯이 뛰고 있겠지. 흥분과 긴장, 두려움 때문에. 그건 네 심장이 아니야. 상황에 끌려다니는 고깃덩어리일 뿐이지.”
서준은 그의 말대로 눈을 감고 가슴에 귀를 기울였다. 쿵, 쿵, 쿵, 쿵. 귓가에 울릴 정도로 빠르고 거친 박동.
“네 몸의 주인은 너다. 네 팔다리를 네 마음대로 움직이듯, 심장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해. 물론, 완벽하게는 안 되겠지. 하지만 박자를 조금 늦추거나, 조금 빠르게 하는 건 가능하다. 그 열쇠는 호흡에 있어.”
주진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숨을 아주 천천히, 끝까지 들이마셔봐. 폐가 터지기 직전까지. 그리고 잠시 멈춰. 그 다음, 들어온 시간보다 두 배 더 길게, 아주 천천히 내뱉어라. 마지막 한 방울의 공기까지 다 빠져나간다고 생각하면서. 네 모든 의식을 오직 그 들숨과 날숨에만 집중해.”
서준은 그의 지시를 따랐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심장은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안 됩니다… 모르겠어요.”
“그 소리를 들어!” 주진우가 버럭 소리쳤다. “심장이 뛰는 소리, 피가 혈관을 흐르는 소리, 네 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를 들어! 그리고 네가 지휘자가 되는 거야. 숨을 내쉴 때마다, 심장에게 명령해. ‘조용히.’ ‘천천히.’ 라고.”
다시, 서준은 호흡에 집중했다. 들이쉬고, 멈추고, 길게 내뱉는다. 쿵, 쿵, 쿵… 거친 박동 소리에 자신의 의식을 섞어 넣었다. ‘천천히.’ 다시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조금만 더, 천천히.’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미친 듯이 날뛰던 심장의 박동이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거친 북소리가, 조금씩 장엄한 큰북 소리로 변해가는 느낌. 서준은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몸의 비자발적인 반응을 통제하는 경이로운 감각을 맛보았다.
“됐다.”
주진우가 짧게 말했다. 그는 서준의 얼굴만 보고도 변화를 알아차렸다.
“레이스 초반 100미터는 이걸 유지해. 일부러 속도를 늦추라는 게 아니야. 불필요한 흥분을 가라앉히고, 가장 효율적인 심박수로 헤엄치는 거다. 그리고 150미터, 데드 포인트가 왔을 때. 그때는 반대로 하는 거다. 호흡을 짧고 강하게 끊어 쉬면서 심장을 깨워. ‘지금부터 전쟁이다!’라고 신호를 보내는 거지. 할 수 있겠?”
서준은 조용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혼란이나 두려움이 없었다. 차분하고, 깊은 호수 같은 눈빛.
“해보겠습니다.”
결승전 출발대. 서준은 다시 권시혁의 옆 레인에 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눅 들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조용히 호흡을 골랐다. ‘천천히.’ ‘고요하게.’
삐-!
총성과 함께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권시혁은 한 마리 돌고래처럼 물속을 파고들며 앞서 나갔다. 서준은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신의 호흡과 심장 박동에만 집중했다. ‘쿵… 쿵… 쿵…’ 일정하고, 깊은 울림. 그는 8명의 선수 중 거의 꼴찌로 50미터를 통과했다. 관중석에서는 ‘예선 때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100미터 턴. 권시혁은 압도적인 1위. 포세이돈의 최정혁이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서준은 7위로 턴을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150미터 지점. 마의 ‘데드 포인트’가 찾아왔다.
다른 선수들의 스트로크가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최정혁조차 기계적인 움직임에 미세한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서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호흡을 바꿨다. ‘흡-하! 흡-하!’ 짧고 폭발적인 호흡. 심장에 보내는 기폭 신호였다. 잠들어 있던 심장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박동이 미친 듯이 빨라지며, 온몸의 혈관으로 뜨거운 피를 뿜어냈다. 비축해 두었던 모든 에너지가 폭발했다.
“저… 저 선수…!”
중계석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7위에 처져 있던 서준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앞으로 튀어 나가고 있었다. 6위, 5위, 4위… 지쳐서 허우적거리는 선수들을 마치 정지된 장애물처럼 추월했다.

마지막 25미터. 이제 그의 앞에는 단 두 명. 2위 최정혁과, 황제 권시혁뿐이었다.
권시혁은 처음으로 옆 레인을 돌아보았다. 그의 유희로 가득 찼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기세.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자신 역시 숨겨두었던 마지막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서준은 최정혁을 추월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황제의 등을 향해 팔을 뻗었다. 권시혁도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두 개의 거대한 물보라가 결승점을 동시에 덮쳤다.
수영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과 함께, 모두가 전광판을 주목했다.
1위 [4 LANE] 권시혁: 1:48.52 (대회 신기록) 2위 [1 LANE] 한서준: 1:48.75 (대회 신기록) 3위 [5 LANE] 최정혁: 1:50.31
패배였다. 하지만 그것은 영광스러운 패배였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처음 출전한 전국체전에서 대한민국 최강자를 턱밑까지 추격하며 대회 신기록을 세운 것이다.
권시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옆 레인의 서준을 쳐다봤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애쓴다’는 여유가 없었다. 대신, 진짜 강적을 만난 자의 뜨거운 흥분과 경계심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서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름이… 한서준이라고 했나?” 권시혁이 씩 웃었다. “내년에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다시 보자. 그때는… 오늘처럼 재미있지는 않을 거다.”
그것은 황제의 선전포고였다. 그리고 서준은, 그 선전포고를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관중석 구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진우는 조용히 모자를 눌러썼다. 그의 입가에 10년 만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유령은 돌아왔고, 황제는 새로운 도전자를 만났다.
이제, 진짜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제11장: 유령의 무게
전국체전이 끝난 후, 수영계는 한서준이라는 이름으로 들끓었다. ‘무명의 고교생, 황제에게 0.23초 차 석패’, ‘시스템 밖에서 나타난 괴물’. 언론은 앞다투어 그의 등장을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정작 폭풍의 핵인 한서준은 다시 서울 신림동의 좁은 고시원 방으로 돌아왔다. 그의 일상은 변한 것이 없었다. 새벽 인력 시장, 오후의 고독한 훈련, 그리고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이강호의 영상 분석.
그날 밤, 훈련을 마친 서준의 방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주진우였다. 그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고, 그 안에서는 따뜻한 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녁은 먹었나.”
두 남자는 복도 끝 공동 주방의 작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봉지 안에서 나온 것은 뜨거운 순대국밥 두 그릇과 소주 한 병이었다. 주진우는 말없이 서준의 그릇에 깍두기를 덜어주고, 자신의 잔에 소주를 채워 단숨에 비웠다.
“오늘 포세이돈 놈들한테서 연락이 왔었다.” 주진우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
“계약금 2억, 최첨단 훈련 시설과 전담팀 제공. 네가 지금까지 꿈도 못 꿔본 최고의 환경을 제안하더군. 서도준, 그놈이 직접 전화했어.”
서준은 숟가락을 든 채 주진우를 바라보았다. 주진우는 텅 빈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놈 목소리를 10년 만에 들었지. 여전히 모든 걸 다 안다는 듯한, 재수 없는 목소리더군. 그놈이 그러더군. ‘주 코치님의 낭만은 존중하지만,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셔야죠. 재능이 있다면 최고의 시스템 안에서 꽃피우게 해주는 게 어른의 역할 아닙니까?’ 하고.”
주진우는 피식, 하고 웃었다. 너무나도 씁쓸한 웃음이었다.
“내 아들, 강호도 그 말을 믿었었다. 재능과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 수영이 너무 좋아서, 물속에 있는 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놈이야. 훈련이 고되다고 징징대면서도, 물에만 들어가면 얼굴에 웃음꽃이 피던 녀석이었지.”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잠겨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놈들은… 강호의 재능이 아니라 웃음을 빼앗아갔어. 억울한 판정? 그거 하나 때문에 강호가 수영을 그만둔 게 아니야. 그날, 자신을 외면하던 동료들의 눈빛, 아들의 멱살을 잡으며 ‘네 욕심 때문에 우리 애들까지 피해 본다’고 소리치던 다른 학부모들, 그리고… 진실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시스템의 편에 섰던 심판과 협회. 강호는 세상에게 배신당한 거야.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물의 세계가, 가장 더러운 욕망으로 가득 찬 곳이란 걸 깨달아버린 거지.”
주진우는 서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는 강호와 달라.” “……” “너는 수영을 할 때 웃지를 않아. 네 얼굴엔 기쁨이 아니라… 책임감과 증명에 대한 갈망만 가득하다. 그래서 네가 마음에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어. 저놈은 대체 뭘 위해 저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걸까.”
주진우는 새로운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그런데 오늘 깨달았다. 너는 강호처럼 부서지지 않을 거다. 강호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라며 세상을 원망했지만, 너는 ‘이런 세상이라면 내가 직접 부딪혀 깨부숴주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 그게 네 삶의 태도고, 네 수영의 방식이다.”
“……”
“포세이돈으로 가라.” 주진우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가서 그놈들이 가진 모든 걸 빨아먹어. 최첨단 장비, 데이터, 영양학, 모든 걸 네 것으로 만들어. 그리고 네가 옳았다는 걸, 시스템의 꼭대기에서 증명해 보여. 그게 내가, 그리고 하늘에 있는 강호가 보고 싶은 그림이다.”
서준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묵묵히 국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떴다. 그리고 대답 대신, 주진우의 텅 빈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주었다. 그것은 스승의 뜻을 따르겠다는, 제자의 무언의 대답이었다.
같은 시각, 테헤란로의 포세이돈 분석실. 서도준은 주진우와의 통화 녹음 파일을 끄며 차갑게 말했다.
“거절했군. 예상대로야.”
그의 앞에는 ‘메트로놈’ 최정혁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전국체전 이후, 최정혁의 데이터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완벽했던 그의 심박수와 스트로크 패턴에 불규칙성이 발견된 것이다.
“정혁아.” 서도준이 부드럽게 불렀다. “패배가 두렵나?”
“…데이터에 없는 변수를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시스템에 입력되지 않은 바이러스가 나타났을 뿐이니까. 이제 그 바이러스를 잡을 백신을 줄 때가 됐지.”
서도준은 스크린에 하나의 영상을 띄웠다. 그것은 미국 해군 특수부대 네이비씰(NAVY SEAL)의 수중 훈련 영상이었다. 손발이 묶인 채 물에 빠져, 오직 코어 근육과 돌고래 같은 움직임만으로 생존하는 극한의 훈련.
“다음 달, 전원 동계 특수 훈련에 들어간다. 목표는 하나다. 너희 몸에서 ‘인간적인 한계’라는 데이터를 삭제하는 거다. 한서준이 정신력으로 헤엄친다고? 좋아. 우리는 그 정신력조차 필요 없는, 완벽하고 압도적인 신체를 만들어주지.”
서도준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의 삶의 태도는 ‘통제’였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제거하거나, 혹은 그 변수조차 무의미하게 만들 압도적인 힘으로 억누르는 것.
그는 한서준이라는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시스템 전체를 동원한 거대한 방화벽을 쌓기 시작했다. 내년 봄에 있을 국가대표 선발전, 그곳이 바로 두 개의 세상이 충돌할 마지막 전쟁터가 될 것이었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