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패드를 찍는 순간, 전광판의 숫자는 의심의 여지 없는 승리를 선언했다. 그의 개인 최고 기록을 0.5초나 앞당긴, 압도적인 기록. 하지만 수영장에는 환호 대신 섬뜩한 정적이 흘렀다. 야유를 퍼붓던 코치들은 입을 다물었고, 심판석에 앉아있던 위원회 임원은 굳은 얼굴로 옆 사람과 무언가 짧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놀라움이 아니라, 성가신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듯한 차가운 계산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승리가 아니었다.

시스템의 턱밑에 칼을 들이댄,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서준이 물 밖으로 나왔을 때, 그 누구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풀사이드의 코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등을 돌려 자기 선수들을 챙기거나, 딴청을 피우며 자리를 떴다. 그들은 서준을, 만져서는 안 될 위험한 존재로 취급했다. 동정이나 축하가 아닌, 철저한 외면.
그것이 시스템이 개인에게 가하는 가장 현실적인 폭력이었다. 탈의실에서 혼자 짐을 챙기는 서준에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새치’ 황인철이었다. 그는 오늘 몰래 관중석에 숨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단하더구나. 근데… 이제부터가 진짜 큰일이다.” 그는 서준의 어깨를 툭 치며 씁쓸하게 말했다. “저놈들은 이제 널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야. 그냥 부러뜨리려고 들겠지. 조심해라. 물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그의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과거에 비슷한 일을 겪었던 자의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그날 밤. 서울 변두리의 허름한 복싱 체육관. 샌드백 터지는 소리만이 간간이 울리는 그곳에서, 은퇴한 코치 강태수가 스마트폰으로 전송된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서준의 기록회 영상이었다. 영상을 보내준 건, 아직 연맹에 남아있는 마음 맞는 후배 코치였다. “살아있네… 저 눈빛…”
강태수는 10년 전, 자신의 제자였던 이지훈을 떠올렸다. 이강호와 같은 해에, 비슷한 재능을 가졌지만 다른 종목에서 활약했던 선수. 그 역시 위원회의 파벌 싸움과 후원사 입김에 밀려, 있지도 않은 부상 스캔들로 매장당해야 했다. 강태수는 그때 저항하지 못했다.
제자 하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밥줄과 남은 제자들의 미래를 걸 수 없었다. 그 비겁함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가슴에 납덩이처럼 남아있었다. 그는 서준의 모습에서 지켜주지 못했던 제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저 아이도 결국 똑같은 방식으로 부서지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다시 그 더러운 물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영상을 끄려는 순간, 마지막 터치패드를 찍고 주위를 둘러보는 서준의 외로운 눈빛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핸드폰을 들었다. 하지만 이진우에게 직접 연락할 용기가 없었다. 대신, 그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봤던 한 기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시스템에 대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던, ‘뉴스 프로브’의 최서연 기자. “여보세요.” “…뉴스 프로브, 최서연 기자님 되십니까.” “네, 맞는데 누구시죠?” “이름은… 밝힐 수 없습니다. 그냥, 수영에 대해 잘 아는 늙은이가 하나 있다고만 알아두쇼.” 강태수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당신이 찾는 거…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소. 10년 묵은 일지(日誌) 하나가 있는데… 관심 있다면?” 최서연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평범한 제보가 아님을 깨달았다.
다음 날, 약속 장소인 복싱 체육관에서 마주한 강태수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최서연을 맞았다. 그는 낡고 누렇게 변색된 훈련 일지 한 권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이지훈 선수의 훈련 일지였다. “가져가쇼. 대신 내 이름은 절대, 어디에도 나와선 안 되오.” 최서연은 조심스럽게 일지를 펼쳤다. 빼곡하게 적힌 훈련 내용과 기록들. 그리고 페이지 곳곳에, 이지훈 선수가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짧은 메모들이 있었다.
‘오늘 코치님이 아닌 위원회 사람이 와서 훈련을 지켜봤다. 기분이 나빴다.’ ‘후원사 아들이라는 녀석이 내 레인에서 헤엄쳤다. 나보다 한참 느렸다.’ ‘코치님이 힘든 표정이다. 나 때문에 곤란해지신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깨가 아프지 않은데,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고 한다. 뭔가 이상하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날짜도 적히지 않은 채, 번진 글씨로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수영이… 무서워졌다.’
그것은 단순한 훈련 일지가 아니었다. 시스템이 한 젊은 선수의 꿈과 영혼을 어떻게 서서히 갉아먹고 파괴했는지에 대한, 처절한 기록이었다. 최서연은 이 일지가 자신이 찾던 ‘패턴’의 가장 결정적인 증거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돈 봉투가 오간 정황 증거와, 이 살아있는 증언이 결합된다면… 그녀는 강태수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 용기, 절대 헛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최서연은 곧바로 이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치님. 박민준, 이지훈, 그리고 이강호… 제가 이 세 개의 점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선을 세상에 보여줄 마지막 한 점입니다. 바로 한서준이라는 이름의 점이요.“
제19화 디지털 잉크의 독
기록회에서의 압도적인 승리. 그러나 그 승리가 안겨준 것은 영광이 아니라, 차갑고 끈질긴 그림자였다. 다음 날 아침, 인터넷 스포츠 섹션의 헤드라인은 한서준의 기록이 아니었다.
[불안정한 천재? 한서준, 불성실한 태도로 퇴출 후 돌발 행동]
기사는 교묘했다. 그의 뛰어난 기록을 인정하면서도, 그 기록이 ‘통제되지 않는 성격’과 ‘팀워크를 해치는 독선’의 산물인 것처럼 포장했다. 포세이돈 관계자의 익명 인터뷰를 인용해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시스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부족해 안타까웠다”는 식의 동정 어린 비난을 쏟아냈다.
기록회에서의 압도적인 역영은 ‘자신을 내쫓은 시스템에 대한 비이성적인 분노 표출’로 둔갑해 있었다. 댓글은 순식간에 오염됐다. ‘어쩐지… 눈빛이 좀 독해 보이더라.’ ‘혼자 잘하면 뭐함? 인성이 저런데 국대가 될 수 있겠음?’ ‘서도준 디렉터가 괜히 내보냈겠냐. 다 이유가 있는 거지.’ 서도준은 칼을 쓰지 않고 상대를 베는 법을 알았다. 그는 서준의 기록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 기록 위에 ‘불안정한 시한폭탄’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넣었다. 대중과 스폰서, 그리고 다른 선수들로부터 서준을 고립시키려는, 치밀하게 계산된 미디어 플레이였다.
인쇄소 지하. 세 사람은 침묵 속에서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시작됐군.” 이진우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놈들은 이제 서준이를 레인 안에서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정했어. 그래서 레인 밖의 세상을 전장으로 끌어들인 거다.” “이건 단순한 언론 플레이가 아니에요.” 최서연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와 결의로 굳어 있었다. “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위원회 홍보팀 출신이에요. 이건 포세이돈과 위원회가 ‘한서준’이라는 개인을 상대로 벌이는 공식적인 전쟁 선포예요.” 모두의 시선이 서준에게 향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 옆에 달린 악의적인 댓글들을 묵묵히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분노나 억울함이 아닌, 깊은 고요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노량진의 소음 속에서 깨달음을 얻은 그의 심장은, 이 디지털 잉크의 독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준이 조용히 물었다. “반박 기사를 내보내는 건 의미 없어. 진흙탕 싸움이 될 뿐이야.” 최서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더 큰 걸 터뜨려서, 이 작은 불을 꺼버려야 해요. 판을 새로 짜야 합니다.” 그녀는 벽에 붙은 화이트보드에 ‘이강호’, ‘이지훈’, ‘박민준’의 이름을 나란히 적었다. 그리고 그 이름들을 하나의 선으로 이었다. “제가 그동안 취재한 자료와 강태수 코치님이 주신 일지. 이걸 바탕으로 탐사보도 다큐멘터리를 만들 겁니다. ‘사라진 이름들’이라는 제목으로요. 시스템이 어떻게 재능 있는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해왔는지, 그 10년의 역사를 세상에 고발하는 거죠. 그리고 그 다큐의 마지막은…”
그녀는 서준을 바라보았다. “시스템의 칼날 앞에 선, 현재진행형의 피해자이자 유일한 저항자인 ‘한서준’ 당신의 이야기로 끝을 맺을 거예요.” 그것은 거대한 도박이었다. 다큐가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 서준은 홀로 모든 비난과 압박을 견뎌내야 했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겠나?” 이진우가 물었다. 서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부터 이진우의 훈련은 다시 한번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서준을 수영장에 데려가지 않았다. 대신, 방수 이어폰을 서준의 귀에 꽂아주었다. 이어폰에서는 어제 서준에 대해 달렸던 모든 악성 댓글과 비난 기사를 녹음한 파일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네 이름은 한서준이야. 독선적이고, 팀워크를 모르는, 불안정한 시한폭탄이지. 넌 국가대표가 될 자격이 없어.” 이진우는 녹음된 기사를 읊조리는 자신의 목소리 위로, 실제 욕설과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텅 빈 육상 트랙으로 서준을 데려갔다.
“400미터, 10바퀴. 쉬지 말고 뛰어. 네 귓속의 저주가 네 심장 박동을 이기게 놔두지 마라. 저 소음 속에서도, 너는 오직 네 목표를 향해 달려야 한다.” 서준은 달리기 시작했다. 귓속에서는 자신을 향한 저주가 메아리쳤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나는 정말 그런 놈인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독초처럼 피어오르려 했다. 하지만 그는 달렸다. 아스팔트를 박차는 자신의 발소리, 거칠어지는 숨소리,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의 박동. 그는 오직 그 살아있는 감각에만 집중했다. 그의 싸움은 이제, 기록 단축이 아니었다. ‘나’라는 존재를 지켜내기 위한, 영혼의 레이스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이진우의 낡은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누구시오.” “…저, 강태수입니다.” 10년 만에 듣는, 한때 라이벌이자 동료였던 코치의 목소리였다. “TV에서… 한서준이라는 아이에 대한 기사를 봤소. 하는 짓이… 10년 전 그때와 똑같더군. 이 코치, 혼자 싸우게 해서 미안했네.” 그의 목소리는 깊은 회한에 젖어 있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 말고도 그 시절에 당했던 이들이 몇 명 더 있소. 우리도 이제… 입을 열 때가 된 것 같아서.” 이진우는 전화기를 든 채, 묵묵히 트랙을 달리는 서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혼자만의 역류가 아니었다. 수면 아래 잠겨 있던 수많은 이들의 침묵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되어 깨어나고 있었다.
제20화 균열의 시작
시스템의 반격은 거셌지만, 그들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다. ‘한서준’이라는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물 밑에 잠겨 있던 수많은 그림자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강태수 코치의 연락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진우의 낡은 휴대폰은 며칠 동안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울렸다. 10년 전, 5년 전, 작년에… 각기 다른 이유로 시스템에 의해 밀려났던 코치들이었다. 그들의 비밀스러운 회동 장소는 강태수의 복싱 체육관이었다.
링 위에는 더 이상 선수들이 없었지만, 그곳에 모인 코치들의 눈빛은 현역 시절보다 더 뜨겁게 타올랐다. 그들은 최서연이 가져온 ‘사라진 이름들’의 명단을 보며 자신들이 겪었던 일들을 퍼즐 조각처럼 맞춰나갔다. “내 제자 녀석은 평영에서 갑자기 슬럼프가 왔었지. 지금 보니, 포세이돈 놈들이 후원하는 배영 선수랑 메달 색깔이 겹쳐서였어.” “나는 위원회에서 직접 압력이 들어왔소. ‘선수 장래를 생각해서’ 유학을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그게 은퇴하라는 소리였지.”
분노와 회한으로 가득 찬 증언들. 그들은 각자 외롭게 싸우다 스러져갔지만, 이제는 서로의 상처에서 거대한 그림의 윤곽을 보고 있었다. “결국, 우리 모두가 한서준 그 아이에게 빚을 진 셈이군.” 강태수가 샌드백을 치며 말했다. “우리가 침묵했기 때문에, 저 어린놈이 혼자서 저 모든 짐을 짊어지게 된 거야.” 그 순간, 이진우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제 빚을 갚을 때가 됐소.” 그들은 복싱 체육관 한구석에 자신들이 가진 낡은 훈련 장비들을 하나둘씩 가져오기 시작했다.
근력 훈련용 밴드, 스트로크 교정용 패들, 구형 수중 카메라까지. 그리고 체육관 벽에 낡은 화이트보드를 걸었다. 그들은 그곳에 ‘국가대표 선발전 D-30’이라고 적었다. 복싱 체육관은 ‘팀 아웃캐스트(Team Outcast)’, 즉 ‘추방자들의 팀’을 위한 비밀 훈련 기지이자 전쟁 상황실이 되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분야의 노하우를 서준에게 전수하기 시작했다. 강태수는 스타트 파워를 극대화하는 순발력 훈련을, 다른 코치는 턴 동작의 효율을 높이는 비법을. 이진우 혼자서는 채워줄 수 없었던 빈틈들이, 시스템에 의해 버려졌던 거장들의 지혜로 채워지고 있었다.
한편, 포세이돈 트레이닝 센터의 분위기는 얼음장 같았다. 최서연은 ‘사라진 이름들’ 다큐멘터리를 바로 공개하는 대신, 더 영리한 방법을 썼다. 그녀는 자신의 SNS에 특정 이름은 거론하지 않은 채, ‘최근 10년간 비정상적으로 은퇴가 잦았던 유망주들의 포지션과 포세이돈 주력 선수들의 포지션 상관관계 분석’이라는 제목의 짧은 데이터 분석 칼럼을 올렸다. 그것은 폭탄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스템의 심장부에 심어진, 조용히 똑딱거리는 시한폭탄이었다. 선수들은 겉으로 동요하지 않는 척했지만, 훈련 중 서로의 눈치를 보거나 밤에 몰래 그 칼럼을 검색해보는 이들이 늘어났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보이지 않는 불안이,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장 크게 흔들린 것은 ‘메트로놈’ 최정혁이었다. 그의 데이터는 완벽했지만, 그의 마음은 아니었다. 그는 한서준이 던졌던 질문을 잊을 수 없었다. ‘내가 지금 헤엄치고 있는 이 물이… 과연 깨끗한 물인지.’ 그날 저녁, 최정혁은 개인 훈련을 핑계로 센터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한서준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강남의 한 빌딩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로프를 정리하고 나오는 서준의 모습은 수영 선수라기보다, 삶에 지친 청년에 가까웠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최정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평탄했지만,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무슨 짓 말하는 건데.” “시스템을 부정하는 것. 디렉터님께 반항하는 것. 너는 그냥 조용히 수영만 하면 됐어. 그랬다면 너는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왜 스스로 모든 걸 망치는 거야?”
그것은 진심 어린 질문이었다. 시스템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에게, 서준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자해 행위나 다름없었다. 서준은 작업 도구가 든 가방을 고쳐 메며 그를 바라보았다. “너, 박민준이 쓰던 수경 본 적 있어?”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 녀석 수경, 끈이 다 닳아서 고무줄로 묶어서 쓰던 거였어. 부모님이 사주신 첫 수경이라, 낡아도 버릴 수가 없다고 했거든.” 서준은 최정혁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너희들에게 수영은 이기기 위한 ‘게임’이겠지만, 어떤 놈에게는 그게 삶의 ‘전부’야. 너희는 그 전부를 너무나 쉽게 빼앗아갔어. 나는 그걸 되찾으러 온 거고. 그게 네 질문에 대한 답이다.” 서준은 그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최정혁은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게임’과 ‘전부’. 그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들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믿어왔던 완벽한 세계에 아주 작은 의심의 씨앗이 심어졌음을 느꼈다.
다음 날, 서도준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최정혁의 훈련 데이터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심박수, 스트로크 패턴.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단 하나, 뇌파 분석 데이터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미세한 ‘불안정’ 신호가 감지되고 있었다. 시스템의 가장 완벽한 부품이, 내부에서부터 조용히 녹슬기 시작했다.
제21화 데이터의 유령
포세이돈 트레이닝 센터의 공기는 이전보다 한층 더 차갑고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한서준이라는 ‘바이러스’를 제거한 후, 서도준은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선수들의 외부 통화와 인터넷 사용은 엄격히 제한되었고, 훈련 강도는 살인적인 수준으로 올라갔다. 시스템에 대한 불필요한 의심을 육체의 극한 고통으로 지워버리려는 듯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균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서도준의 사무실. 그는 중앙 스크린에 떠 있는 최정혁의 실시간 생체 데이터를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심박수, 근육 활성도, 젖산 수치. 그러나 그의 시선은 오른쪽 하단의 작은 뇌파 그래프에 고정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잔잔한 호수처럼 안정적이던 그래프에, 미세하지만 분명한 노이즈(noise)가 계속해서 감지되고 있었다.
“정혁아.” 서도준의 호출에, 훈련을 막 마친 최정혁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네 데이터다.” 서도준이 스크린을 가리켰다. “신체는 완벽해. 하지만 머릿속은 시끄럽군. 무슨 생각이라도 있나?” 최정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뇌파를, 마치 타인의 것처럼 무감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서준을 만난 그날 밤 이후, 그의 머릿속에서는 ‘게임’과 ‘전부’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었다. “잡생각은 기록의 적이다.” 서도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어딘가 설득하려는 듯한 기묘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내가 왜 이 시스템을 만들었는지 아나? 나는 스포츠에서 가장 불공정한 요소인 ‘운’과 ‘감정’을 제거하고 싶었을 뿐이야. 재능 있는 선수가 그날의 컨디션이나 멘탈 때문에 무너지는 건 비극이거든. 데이터는 배신하지 않아.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지. 이 시스템은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완벽한 방패다.” 그것은 서도준의 확고한 신념이자, 그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는 최정혁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완벽함을 추구하고, 통제 불가능한 변수를 혐오했던. “한서준은 시스템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놈이다. 그런 선수들은 결국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부서지게 되어 있어. 너는 달라. 너는 파도를 지배하는 법을 배운 거고.” 서도준의 말은 논리적으로 완벽했다. 하지만 최정혁의 마음속에 심어진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스템이 우리를 보호한다면, 박민준은 왜 사라져야 했지?’
그날 밤, 최정혁은 처음으로 시스템이 금지한 행동을 했다. 그는 자신의 최고 등급 접근 권한을 이용해, 포세이돈의 중앙 데이터베이스 서버에 접속했다. 그리고 ‘박민준’의 선수 파일을 열었다. 공식적인 은퇴 사유는 ‘개인 사정으로 인한 의욕 상실’. 하지만 그가 열어본 트레이닝 로그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은퇴 직전 한 달간, 박민준의 모든 훈련 데이터는 그의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고 있었다. 순발력, 지구력, 스트로크 효율까지. 데이터상으로 그는 폭발적인 성장 곡선의 정점에 있었다. 의욕을 상실한 선수의 데이터가 아니었다. 최정혁은 손을 떨며 스크롤을 내렸다.
그리고 파일 가장 하단, 일반 관리자는 볼 수 없도록 암호화된 ‘특별 관리 기록’ 폴더를 발견했다. 그는 망설이다가, 서도준이 비상시에 사용하던 마스터 키 코드를 입력했다. 폴더가 열렸다. 그 안에는 단 하나의 문서 파일이 있었다.
[파일명: PJT-M.J.Park_Retirement_Process.pdf]
파일의 내용은 간단했다. 박민준 아버지의 식당에 대한 세무조사 요청서 사본, 어머니의 공장 인사팀에 보낸 협조 공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수영위원회 징계위원회의 이름으로 작성된 ‘향후 모든 대회 참가 자격 잠정 박탈 가능성에 대한 사전 경고장’. 그것은 데이터가 아니었다.
한 선수의 꿈을, 그의 가족 전체를 인질로 잡고 짓밟아버린, 차갑고 조직적인 폭력의 기록이었다. 최정혁이 믿었던 ‘방패’는, 누군가에게는 가장 잔인한 ‘칼’이었던 것이다. 최정혁은 모니터를 켠 채, 텅 빈 의자에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완벽했던 데이터의 세계가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시스템의 정답이 아닌, 자기 자신의 질문과 마주해야 했다. 이 유령 같은 진실을, 나는 과연 감당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