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세이돈의 공식 제안서는 얇은 서류봉투에 담겨, 주진우가 아니라 한서준의 고시원 총무실 앞으로 배달되었다. 그것은 ‘스카우트 제안’이 아니라 ‘동계 특별 훈련 캠프 참가 자격 부여’라는 오만한 이름의 통지서였다. 마치 자선 단체가 베푸는 시혜와도 같았다.

서준은 서류를 들고 주진우를 찾았다. 주진우는 말없이 서류를 받아 읽어본 뒤, 라이터 불을 붙여 그대로 태워버렸다.
“기록 같은 건 필요 없어. 머릿속에 다 담았으니까.”
재가 되어 흩어지는 종이를 보며 주진우가 말했다.
“놈들은 널 분석하고 통제하려 들 거다. 네 모든 움직임을 데이터로 만들어서, 네가 왜 자기들보다 비효율적인지 숫자로 증명해 보이려 하겠지. 그 함정에 빠지지 마라.”
“어떻게 말입니까?”
“사자의 심장을 가지되, 여우의 두뇌로 행동해라.” 주진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놈들이 시키는 훈련은 죽을힘을 다해 따라가. 네 한계를 시험하고 근력을 키우는 데는 그것보다 좋은 게 없어.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믿지는 마. 놈들의 ‘왜’를 훔치는 거야. ‘왜 이 훈련을 시키는가?’, ‘이 장비의 핵심 원리는 무엇인가?’, ‘이 데이터가 의미하는 진짜 약점은 무엇인가?’.”
그는 서준의 어깨를 잡았다.
“놈들의 심장에 들어가. 하지만 네 심장은 절대로 뺏기지 마라. 네가 누구인지, 왜 이 물속에 있는지, 단 한 순간도 잊어선 안돼.”
일주일 뒤, 한서준은 거대한 포세이돈 트레이닝 센터의 로비에 섰다. 낡은 수영장의 락스 냄새 대신, 오존 살균기의 희미한 기계음과 비싼 방향제 냄새가 났다. 모든 것이 차갑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돈된 공간. 그곳에서 그는 10년 전의 전설, 서도준과 처음으로 마주했다.
서도준은 트레이닝복 차림이었지만, 마치 맞춤 정장을 입은 것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는 악수 대신, 서준의 신체 데이터를 보여주는 태블릿 화면을 가리켰다.
“한서준 선수. 만나서 반갑다. 네 기록은 인상적이었지만, 데이터는 거짓말을 안 하지.”
화면에는 서준의 스트로크 궤적, 심박수 변화, 킥의 각도 등이 복잡한 그래프로 표시되어 있었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네 수영은… 낭비가 너무 많아. 특히 레이스 후반부, 힘이 떨어졌을 때 자세가 무너지는 각도가 우리 선수들의 3배에 달한다. 열정과 투지? 좋아. 하지만 그건 엔진오일이 새는 낡은 자동차로 F1 경기에 나서는 것과 같아. 우리는 네게 최고의 엔진과 차체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서도준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내용은 서준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재능은 원석이야. 시스템은 그 원석을 가장 비싼 다이아몬드로 세공하는 기술이고. 자네는 아직도 강가에서 그 돌멩이를 맨손으로 문지르고 있는 셈이지. 여기서 우리는 ‘왜’라고 묻는 걸 금지한다. 그냥 ‘어떻게’ 완벽해질 수 있는지만 배우면 돼. 그게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것이 서도준의 삶의 태도였다. 의심과 질문을 거세하고, 검증된 데이터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 그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올바른 길이라는 확고한 신념.
서준은 서도준의 눈을 피하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배우러 왔습니다.”
그의 순응적인 태도에 서도준은 만족한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서준을 수중 트레이닝실, 통칭 ‘큐브(The Cube)’로 안내했다. 사방이 특수 유리로 된 거대한 수조였다. 수조 안에는 수십 개의 카메라와 센서, 그리고 물의 유속을 조절하는 장치가 달려 있었다.
“첫 번째 훈련이다. 유속 2.0m/s. 네 100미터 최고 속도와 같은 속도지. 이 물살을 거슬러 10분간 자세를 유지해. 네 몸의 모든 근육 움직임과 관절 각도는 저기 저 메인 컴퓨터로 전송될 거다. 네 몸의 잘못된 설명서를, 우리가 새로 써주지.”
서준은 말없이 수경을 쓰고 큐브 안으로 들어갔다. 스위치가 켜지자, 엄청난 기세의 물살이 그의 몸을 때렸다. 마치 폭포수 아래에 서 있는 듯한 압력. 그는 배운 대로 하이 엘보 자세를 잡고, 코어 근육에 힘을 주며 버텼다.
1분, 2분… 팔다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5분이 지나자, 온몸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통제실 유리 너머로, 최정혁을 비롯한 포세이돈 선수들이 무표정하게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실험실의 쥐를 관찰하는 연구원들처럼.
‘포기해. 네 방식은 틀렸어.’ 서도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서준은 이를 악물었다. ‘사자의 심장, 여우의 두뇌.’ 그는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느끼고 있었다. 이 엄청난 저항 속에서, 자신의 몸 어느 부분의 근육이 가장 먼저 지치는지, 자세가 무너지는 순간 상체와 하체의 균형이 어떻게 틀어지는지. 그의 몸이 바로 데이터 그 자체가 되어, 시스템이 잡아내지 못하는 진짜 약점을 스스로 학습하고 있었다.
8분 30초. 결국 서준의 몸은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거친 물살에 떠밀려 수조 벽에 부딪혔다.
“예상보다 오래 버텼군.” 서도준이 인터컴으로 말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시스템을 이길 순 없어.”
서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 밖으로 나왔다. 그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온몸은 탈진 상태였다. 완벽한 패배. 포세이돈 선수들의 눈에 희미한 조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날 밤, 모두가 잠든 기숙사. 서준은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침대 밑에 숨겨둔 낡은 태블릿을 켰다. 화면에는 오늘 ‘큐브’에서 촬영된 자신의 영상이 떠 있었다. 낮에 훈련받는 척하며, 주머니 속 소형 녹음기에 연결된 방수 마이크로 녹화해 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그리고 이강호의 훈련 영상을 옆에 나란히 띄웠다. 이강호는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밧줄에 타이어를 묶고 헤엄치고 있었다.
‘큐브’의 인공적인 물살과, 바다의 예측 불가능한 파도. 데이터에 기반한 자세 교정과, 자연의 저항에 맞서 싸우며 스스로 최적의 자세를 찾아가는 몸부림.
서준은 두 개의 영상을 번갈아 보며, 시스템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것은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흐름’과 ‘균형’의 감각이었다.
포세이돈은 그의 몸을 분해해서 완벽한 부품으로 재조립하려 했다. 하지만 서준은 그들의 공장에서 최고의 부품들을 훔쳐, 자신이라는 이름의,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엔진을 스스로 조립하기 시작했다. 서도준은 서준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진짜 싸움은 그의 통제권 밖, 낡은 태블릿 불빛 아래에서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제13장: 바람의 길, 거미의 눈
포세이돈에서의 낮 훈련은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지옥이었다. 하지만 서준에게는 또 다른 지옥이 있었다. 바로 주말의 ‘아르바이트’다. 그는 더 이상 새벽 인력 시장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서울의 하늘로 올라갔다. 강남의 마천루 외벽을 청소하는 로프공. 시급이 세고, 평일 훈련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택한 일이었지만, 그곳은 물속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극한이었다.
그의 사수는 50대의 베테랑 ‘김 반장’이었다. 그는 30년 넘게 서울의 빌딩들을 거미처럼 오르내린, 이 바닥의 전설이었다. 그는 서준에게 첫날 이렇게 말했다.
“여기선 수영 따윈 아무 소용없어. 힘자랑하다간 바람에 휩쓸려 저 아래 아스팔트에 피떡 되는 거야. 여긴 힘으로 버티는 게 아니라, ‘길’을 읽는 곳이다.”
처음 로프에 매달렸을 때, 서준은 수백 미터 아래를 내려다보며 현기증으로 온몸이 굳었다. 근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빌딩 사이를 휘몰아치는 칼바람 앞에서 그의 몸은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멍청하게 바람이랑 맞서 싸우지 마!” 아래쪽에서 작업하던 김 반장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불어오는 길을 느껴! 벽의 미세한 굴곡, 창틀의 방향을 봐. 바람이 부딪혀서 흘러나가는 길이 보일 거야. 그 길에 네 몸을 맡겨. 물살을 타는 거랑 똑같아!”
‘물살을 타라.’ 그 한마디에 서준의 머릿속이 번쩍 뜨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주진우가 가르쳐줬던 것처럼, 자신의 감각을 열었다. 피부에 와닿는 바람의 압력, 로프가 팽팽해지는 미세한 진동. 그는 자신을 때리는 바람을 ‘저항’이 아닌 ‘흐름’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몸을 살짝 비틀어 바람을 등 뒤로 흘려보냈다. 거짓말처럼 몸의 흔들림이 줄어들었다.
그 이후로, 서준은 빠르게 적응해나갔다. 그는 포세이돈의 과학적인 근력 훈련으로 다져진 강인한 코어와, 주진우에게서 배운 ‘흐름을 읽는’ 감각을 로프 위에서 완벽하게 결합시켰다. 김 반장은 “저놈은 물건이야. 1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하늘꾼’이야.”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날은 ‘KN스포츠 마케팅’이라는 회사가 입주한 테헤란로 40층짜리 빌딩을 작업하는 날이었다. KN스포츠는 포세이돈의 최대 후원사 중 하나였다.
로프를 타고 35층쯤 내려왔을 때였다. 서준은 무심코 한 사무실의 통유리창을 스퀴지로 닦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창문 너머의 광경에 숨을 멈췄다.
회의실 안에는 서도준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는, 서준이 뉴스에서 몇 번 보았던 수영위원회의 고위 임원과, 처음 보는 기름진 인상의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중년 남자가 돈다발이 든 것으로 보이는 두툼한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로 쓱 밀었다. 서도준은 그것을 받지 않고, 턱짓으로 옆에 있던 다른 직원에게 가리켰다.
그들의 입 모양을 정확히 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명백했다. 단순한 후원 계약 회의가 아니었다. 무언가 은밀하고, 부정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서준은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자신의 작업을 계속했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사자의 심장, 여우의 두뇌.’ 주진우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는 지금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때였다. 빌딩 1층 로비에서 소란이 일었다. 웬 젊은 여자가 경비원들에게 가로막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오늘 KN스포츠랑 수영위원회 임원들 비공개 회동 있는 거 다 압니다!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합니다!”
그녀의 목에는 프레스증이 걸려 있었다. 탐사보도 전문 매체 ‘뉴스 프로브’의 최서연 기자. 그녀는 몇 년째 대한수영협회의 비리를 파헤치고 있는, 협회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경비원들에게 막혀 로비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최서연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수백 미터 상공의 로프에 매달려, 35층 창문에 파리처럼 붙어있는 서준을 발견했다.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작업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온 서준에게,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던 최서연이 다가왔다.
“저기요, 학생.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시죠.”
“나 기자예요. 혹시 35층에서… 못 봤어요? 양복 입은 남자들 모여 있는 거.”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다급했다.
서준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하지만 상대는 기자다. 일이 커질 수 있다. 주진우는 ‘여우처럼 행동하라’고 했다.
“창문 닦느라 바빠서요. 그런 거 신경 쓸 겨를 없습니다.”
서준은 일부러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최서연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명함 한 장을 서준의 작업복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었다.
“혹시라도… 아주 사소한 거라도 기억나는 게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꼭 연락 줘요. 학생이 본 게, 어떤 아이의 인생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는 장면일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날 밤, 고시원 방. 서준은 낡은 태블릿으로 이강호의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최서연 기자의 명함이 놓여 있었다.
‘어떤 아이의 인생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는 장면.’
서준은 10년 전, 억울한 판정에 눈물 흘리던 소년 이강호의 앳된 얼굴을 떠올렸다. 오늘 자신이 본 장면이, 어쩌면 10년 전 그날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싸움은 이제 50미터 레인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수면 아래에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추악한 암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흐름의 한가운데로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서 완벽하게 결합시켰다. 김 반장은 “저놈은 물건이야. 1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하늘꾼’이야.”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날은 ‘KN스포츠 마케팅’이라는 회사가 입주한 테헤란로 40층짜리 빌딩을 작업하는 날이었다. KN스포츠는 포세이don의 최대 후원사 중 하나였다.
로프를 타고 35층쯤 내려왔을 때였다. 서준은 무심코 한 사무실의 통유리창을 스퀴지로 닦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창문 너머의 광경에 숨을 멈췄다.
회의실 안에는 서도준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는, 서준이 뉴스에서 몇 번 보았던 대한수영협회의 고위 임원과, 처음 보는 기름진 인상의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중년 남자가 돈다발이 든 것으로 보이는 두툼한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로 쓱 밀었다. 서도준은 그것을 받지 않고, 턱짓으로 옆에 있던 다른 직원에게 가리켰다.
그들의 입 모양을 정확히 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명백했다. 단순한 후원 계약 회의가 아니었다. 무언가 은밀하고, 부정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서준은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자신의 작업을 계속했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사자의 심장, 여우의 두뇌.’ 주진우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는 지금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때였다. 빌딩 1층 로비에서 소란이 일었다. 웬 젊은 여자가 경비원들에게 가로막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오늘 KN스포츠랑 수영협회 임원들 비공개 회동 있는 거 다 압니다!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합니다!”
그녀의 목에는 프레스증이 걸려 있었다. 탐사보도 전문 매체 ‘뉴스 프로브’의 최서연 기자. 그녀는 몇 년째 대한수영협회의 비리를 파헤치고 있는, 협회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경비원들에게 막혀 로비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최서연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수백 미터 상공의 로프에 매달려, 35층 창문에 파리처럼 붙어있는 서준을 발견했다.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작업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온 서준에게,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던 최서연이 다가왔다.
“저기요, 학생.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시죠.”
“나 기자예요. 혹시 35층에서… 못 봤어요? 양복 입은 남자들 모여 있는 거.”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다급했다.
서준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하지만 상대는 기자다. 일이 커질 수 있다. 주진우는 ‘여우처럼 행동하라’고 했다.
“창문 닦느라 바빠서요. 그런 거 신경 쓸 겨를 없습니다.”
서준은 일부러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최서연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명함 한 장을 서준의 작업복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었다.
“혹시라도… 아주 사소한 거라도 기억나는 게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꼭 연락 줘요. 학생이 본 게, 어떤 아이의 인생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는 장면일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날 밤, 고시원 방. 서준은 낡은 태블릿으로 이강호의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최서연 기자의 명함이 놓여 있었다.
‘어떤 아이의 인생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는 장면.’
서준은 10년 전, 억울한 판정에 눈물 흘리던 소년 이강호의 앳된 얼굴을 떠올렸다. 오늘 자신이 본 장면이, 어쩌면 10년 전 그날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싸움은 이제 50미터 레인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수면 아래에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추악한 암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흐름의 한가운데로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제14장: 사라진 이름
포세이돈의 동계 훈련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서준의 몸은 시스템이 설계한 극한의 훈련을 통해 강철처럼 단련되었다. 그의 기록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고, 이제는 훈련에서 최정혁과 대등한, 혹은 그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서도준은 불안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서준은 이제 ‘통제 가능한 변수’였다. 시스템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한 좋은 스파링 파트너.
분위기가 바뀐 것은 식당에서였다. 선수들이 식판을 들고 저녁을 먹고 있을 때, 한쪽 TV에서 스포츠 뉴스가 흘러나왔다. 다가오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조명하며 유력 후보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황제 권시혁, 메트로놈 최정혁, 그리고 몇몇 포세이돈의 주력 선수들.
“어? 박민준은 왜 안 나오지?”
한 선수가 무심코 뱉은 말에 식당 안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박민준. 그는 포세이돈 소속은 아니지만, 지방의 한 체고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단거리 스페셜리스트였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재능으로 권시혁의 50미터 기록에 근접했던 유일한 고교 선수. 모두가 그를 강력한 다크호스로 꼽고 있었다.
“민준이? 걔 그만뒀잖아.” 다른 선수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만둬? 왜? 부상이라도 당했어?” “아니, 그냥… 개인 사정이래. 갑자기 수영이 하기 싫어졌다고 했다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선발전을 코앞에 두고, 인생을 걸었던 선수가 갑자기 수영이 하기 싫어졌다는 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더 깊게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아는 영리한 선수들이었다. 불필요한 질문은 자신을 위험하게 만들 뿐이었다.
서준은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떤 아이의 인생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는 장면.’ 최서연 기자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박민준. 그 아이가 바로 그 희생양일지도 모른다.
그날 밤, 서준은 처음으로 훈련을 무단이탈했다. 그는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가,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해진 명함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최서연 기자님… 맞으십니까.” “…누구죠?” ” 로프… 타던 사람입니다.”
수화기 너머, 최서연의 숨소리가 순간 멈췄다. 그녀는 직감했다.
약속 장소는 24시간 운영하는 동네 도서관의 가장 구석진 자리였다. 최서연은 노트북을 펼쳐놓고 위장한 채 서준을 기다렸다. 잠시 후, 후드를 깊게 눌러쓴 서준이 그녀의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무서웠을 텐데, 연락 줘서 고마워요.” 최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박민준 선수… 어떻게 된 겁니까.” 서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최서연은 한숨을 쉬며 노트북 화면을 돌려 서준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복잡한 인물 관계도와 자금 흐름으로 보이는 도표가 떠 있었다.
“박민준 선수는 너무 빨랐어요. 그게 죄였죠.”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이번 선발전 남자 50미터 자유형에는 정해진 ‘주인공’이 있었어요. 포세이돈 소속의 한 선수죠. 아버지가 유력 정치인이고, KN스포츠의 VVIP 고객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박민준이 나타난 거예요. 데이터상으로, 박민준이 그 ‘주인공’을 이길 확률이 80%가 넘었어요. 시스템에 생긴 치명적인 버그였죠.”
그녀는 서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위원회와 포세이돈, 그리고 KN스포츠가 움직인 거예요. 박민준 선수 아버지가 작은 식당을 하시는데, 갑자기 위생법 위반으로 영업 정지를 당하고, 세무조사가 들어왔어요. 어머니는 다니던 공장에서 해고당하셨고요. 박민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어요. 수영을 그만두고 가족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꿈을 좇다가 가족 전체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인가.”
서준의 주먹이 책상 아래에서 단단하게 쥐어졌다. 이것은 스포츠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걸고 벌이는 비열한 전쟁이었다. 그가 35층 창문 너머로 본 돈 봉투는, 바로 한 소년의 꿈을 지워버리는 대가였던 것이다.
“제가 본 게… 증거가 될 수 있습니까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정황 증거일 뿐이죠.” 최서연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 자리에 누가 있었고,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내부 고발자나 결정적인 증언이 필요해요. 한서준 선수… 혹시 포세이돈 안에서 뭔가 이상한 점, 들은 이야기라도 있나요?”
서준은 침묵했다. 그가 아는 것을 말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수영 선수가 아닌 내부 고발자가 된다. 주진우와의 약속, 국가대표의 꿈,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최서연은 그런 서준의 고뇌를 읽었다. 그녀는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노트북의 다른 파일을 열었다. 10년 전, 이강호 선수의 판정 시비 기사들이었다.
“이강호 선수 사건, 저도 오랫동안 취재했어요. 모두가 단순한 오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전 아니라고 봐요. 이것도 결국 같은 문제예요. 시스템은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는 이단아를 용납하지 않아요. 10년 전에는 ‘판정’이라는 칼을 썼고, 오늘은 ‘돈’이라는 칼을 썼을 뿐이죠. 그리고 내일은… 아마 한서준 선수 당신이 그 칼날 앞에 서게 될지도 몰라요.”
그녀는 노트북을 덮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선택은 당신 몫이에요. 물속에서 혼자 싸울 것인지, 아니면 물 밖의 우리와 함께 싸울 것인지.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줘요. 당신이 침묵하면, 제2의 박민준, 제2의 이강호는 계속해서 나타날 거라는 걸.”
고시원으로 돌아온 서준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두 개의 물길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 오직 기록과 승리만을 향해 나아가는 차가운 물길. 그리고 불의에 맞서 싸우는, 뜨겁고 거친 물길.
다음 날 새벽, 동계 훈련 마지막 날. 포세이돈의 모든 선수들이 최종 기록 측정을 위해 수영장에 모였다. 서도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서준이 그에게 다가갔다.
“디렉터님.”
“그래, 한서준 선수. 마지막 날이니 유종의 미를 거둬야지.”
“박민준 선수는… 정말 개인 사정으로 그만둔 겁니까?”
서준의 돌발 질문에 수영장 안의 모든 소음이 순간 멎었다. 서도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시스템에 대해… 불필요한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했을 텐데.”
“질문이 아닙니다.” 서준은 서도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알고 싶을 뿐입니다. 제가 지금 헤엄치고 있는 이 물이… 과연 깨끗한 물인지.”
정면도전이었다. 시스템의 심장을 향해, 가장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서준은 알고 있었다. 이 질문을 던진 순간, 자신은 더 이상 ‘통제 가능한 변수’가 아닌, 제거해야 할 ‘바이러스’가 되었다는 것을. 그의 진짜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제15장: 추방, 그리고 새로운 전쟁
수영장 안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남은 것은 차가운 물이 벽에 부딪히는 희미한 소리와, 서도준의 싸늘하게 식어가는 눈빛뿐이었다. 그는 한서준을, 이해할 수 없는 버그를 마주한 프로그래머처럼 쳐다보았다.
“깨끗한 물?” 서도준은 나지막이 되뇌었다. 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옅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한서준 선수, 물은 원래 깨끗하지 않아. 수많은 선수들의 땀과 눈물, 때로는 욕망과 좌절이 섞여 탁해지는 법이지. 우리가 하는 일은, 그 탁한 물속에서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나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거야. 정수(淨水) 사업이 아니라.”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췄다. 오직 서준에게만 들릴 정도로.
“너는 재능이 있어. 하지만 가장 큰 착각을 하고 있군. 네가 이 물을 바꿀 수 있는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나? 너는 그저 수많은 변수 중 하나일 뿐이야. 시스템은 변수를 싫어하지. 분석하고, 통제하고, 그래도 안 되면… 삭제한다.”
서도준은 다시 몸을 돌려, 굳어있는 모든 선수를 향해 선언했다.
“한서준 선수는 오늘부로 동계 훈련 캠프에서 제외한다. 개인의 망상으로 팀의 훈련 분위기를 저해하는 선수는 포세이돈에 필요 없다.”
추방 선고였다. 그것은 단순한 퇴출이 아니었다. 시스템에 의해 공식적으로 ‘불량품’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이었다. 서준이 짐을 챙겨 나가는 동안, 그에게 말을 거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시선을 피하거나, 못 본 척 자신의 스트레칭에만 열중했다. 오직 최정혁만이, 그 기계 같던 얼굴에 처음으로 ‘혼란’이라는 감정을 담은 채 서준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그날 밤, 허름한 포장마차. 주진우는 말없이 소주잔만 비우고 있었다. 서준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였다. 한참의 침묵 끝에, 주진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잘했다.”
의외의 말이었다.
“그리고… 이 멍청한 새끼야.”
그는 거친 욕설과 함께 서준의 잔을 채워주었다.
“네가 던진 돌멩이 하나 때문에, 이제 저수지 전체가 뒤집힐 거다. 놈들은 더 이상 널 레이스에서 이기는 걸 목표로 삼지 않아. 아예 출발선에 서지도 못하게 만들겠지. 약물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오게 만들 수도 있고, 있지도 않은 폭력 사건에 연루시킬 수도 있어. 그놈들은…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놈들이니까.”
주진우의 얼굴에 깊은 회한과 분노가 동시에 스쳤다. 10년 전, 아들을 지켜주지 못했던 무력한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이제부턴 수영만 잘해서는 안 된다. 넌 이제 그냥 수영 선수가 아니야. 이 더러운 판을 뒤집으려는 혁명가가 되어버렸어. 혁명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주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소개할 사람이 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간판도 없는 낡은 인쇄소 지하의 한 사무실이었다. 문을 열자, 매캐한 담배 연기와 잉크 냄새 속에서 최서연 기자가 노트북을 두드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사무실은 온갖 사건 파일과 취재 자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오셨네요, 코치님.” 그녀는 주진우를 보고, 이내 그의 뒤에 선 서준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제 한 팀이다.” 주진우가 짧게 말했다.
그 순간, 세 사람 사이에 기묘한 연대감이 형성되었다. 시스템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긴 늙은 코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모든 것을 건 젊은 기자. 그리고 시스템의 심장에 칼을 꽂고 돌아온 이름 없는 선수. 각자의 이유로 싸워온 외로운 세 사람이, 처음으로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요.” 최서연이 컴퓨터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박민준 선수 건을 덮기 위해, 위원회가 엉뚱한 스캔들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어요. 아마추어 선수들의 불법 도박 같은 걸로요. 대중의 시선을 돌리고, 내부를 단속하려는 거죠.”
“그럼 우리가 먼저 터뜨려야지.” 주진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증거가 부족해요. 그날 서준 군이 본 돈 봉투… 그 돈의 출처와 명목을 밝혀내지 못하면 그냥 ‘의혹’으로 끝날 뿐이에요.”
모두의 시선이 서준에게 향했다. 이제 그의 역할은 단순히 빨리 헤엄치는 것만이 아니었다.
“제가… 다시 들어가겠습니다.” 서준이 입을 열었다.
“뭐라고?” 최서연과 주진우가 동시에 반문했다.
“포세이돈은 절 내쫓았지만, 아직 수영계에서 완전히 추방시킨 건 아닙니다. 국가대표 선발전 예선에는 참가할 자격이 있어요. 그곳에서 다시 만날 겁니다. 서도준, 최정혁, 그리고… KN스포츠의 검은 돈과 연루된 그 ‘주인공’ 선수까지.”
서준의 눈빛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는 그저 증명에 대한 갈망이었다면, 이제는 확고한 목표를 가진 전사의 눈빛이었다.
“물속에서는 제가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들의 대화, 그들의 눈빛, 그들의 불안. 제가 그들의 심장부에서 균열을 만들어내겠습니다. 코치님은 밖에서, 기자님은 세상에 그 균열을 알려주십시오.”
그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위험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주진우는 한참 동안 서준을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훈련 계획을 전면 수정한다.” 그는 비장하게 선언했다. “지금까지는 ‘기록’을 깨기 위한 훈련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인간’을 깨부수기 위한 훈련이다. 네가 상대해야 할 건 이제 초시계가 아니야. 온갖 비난과 압박, 흔들림 속에서도 0.01초를 유지할 수 있는 강철 심장을 만들어주지. 진짜 지옥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제16장: 소음 속의 침묵
주진우가 말한 ‘새로운 지옥’은 수영장이 아니었다. 다음 날 새벽, 그가 서준을 데려간 곳은 수산물 경매가 한창인 노량진 시장이었다. 비린내와 어부들의 거친 고함, 경매사의 외침이 뒤섞여 정신이 아득해지는 공간.
“오늘의 레인은 저기다.”
주진우가 가리킨 곳은 유람선이 드나드는 혼탁한 한강이었다. 그는 서준의 손목과 발목을 신축성 있는 밴드로 느슨하게 묶었다. 팔다리를 완전히 못 쓰는 건 아니지만, 평소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강철 심장을 만드는 첫 번째 훈련. ‘소음 속의 침묵’.” 주진우는 차가운 바닷바람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놈들은 온갖 방법으로 널 흔들 거다. 관중의 야유, 심판의 편파 판정, 언론의 악의적인 기사. 그 모든 소음 속에서 네 심장 박동을 지켜내는 훈련이야.”
그는 한강철교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그림자 두 개를 가리켰다. 왕복 100미터 남짓한 거리.
“저길 다녀와. 단, 조건이 있다. 오직 네 몸의 코어 근육과 웨이브만으로 나아가야 해. 손과 발은 방향을 잡는 용도로만 써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네 심장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듣지 마. 저 경매사의 외침이 네 심장 박동보다 크게 들리는 순간, 넌 강물속으로 가라앉는 거다.”
그것은 수영이 아니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서준은 차가운 물속으로 들어갔다. 손발이 묶인 채 코어의 힘만으로 나아가려니 몸이 제멋대로 돌아갔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소음은 그의 집중력을 끊임없이 물어뜯었다. ‘저놈 미쳤나 봐!’, ‘물에 빠졌나 본데?’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칼날처럼 날아와 박혔다.
몇 번이나 물을 먹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그때, 주진우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네가 지휘자가 되는 거야!’ 서준은 눈을 감았다. 그는 소음을 막으려 애쓰는 대신, 소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모든 소음의 파도 아래에 있는, 가장 깊고 고요한 자신의 심장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세상의 모든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멀어지고, 오직 그 박동만이 유일한 리듬이 되는 순간. 서준의 몸이 변했다. 그는 더 이상 허우적거리지 않았다.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뱀장어처럼, 부드럽고 강력한 웨이브로 탁한 물을 가르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시각, 최서연은 낡은 인쇄소 지하 사무실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녀는 박민준 사건을 직접 파고드는 대신, 타겟을 바꿨다. ‘KN스포츠’가 지난 5년간 후원했던 모든 주니어 선수들의 명단을 입수해, 그들의 은퇴 시점과 사유를 역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패턴이 있어…” 그녀는 밤샘으로 붉어진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KN스포츠의 후원을 받다가 갑자기 ‘개인 사정’이나 ‘부상’으로 은퇴한 선수 7명. 그들은 모두, 포세이돈의 ‘기대주’들과 포지션이 겹치거나, 그들을 위협할 만한 재능을 보였던 선수들이었다. 박민준은 희생양이 아니라, 반복되는 패턴의 가장 최근 사례일 뿐이었다.
그녀는 증거를 찾기 위해, 그 7명의 선수 중 한 명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작은 식당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부모님은, 그녀가 내민 ‘이강호’의 10년 전 기사를 보고는 결국 무너졌다.
“그놈들이… 우리 애한테 그랬어요. 이대로 계속 수영하면, 아빠 엄마가 길거리에 나앉게 될 거라고…”
최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그 모든 증언을 녹음했다. 시스템의 거대한 실체가, 마침내 꼬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주일 뒤, 수영위원회 홈페이지에 국가대표 1차 선발전 참가자 명단이 공지되었다. 한서준의 이름은 있었다. 하지만 이름 옆에는 붉은색 별표와 함께 ‘지역 예선 통과 기록 재검증 필요’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3일 뒤에 열리는 서울시 수영연맹 주최의 비공식 기록회에서, 기준 기록을 통과해야만 선발전에 참가할 자격을 주겠다는 것. 명백한 보복이자, 함정이었다.
“이건 그냥 기록회가 아니야. 공개 처형장이지.” 주진우가 공지문을 보며 읊조렸다. “놈들은 위원회 소속 코치와 심판들을 전부 동원해서, 네가 압박감에 무너지길 바랄 거다. 거기서 기준 기록 통과에 실패하면, ‘거품이 낀 선수’, ‘훈련 캠프에서 쫓겨날 만한 선수’라는 낙인을 찍어 매장시키려는 속셈이야.”
기록회가 열리는 날. 관악 별빛 스포츠센터는 평소와 다른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관중석은 텅 비어 있었지만, 풀사이드에는 서울시의 웬만한 코치들과 위원회 관계자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서준을, 우리에 갇힌 맹수를 구경하듯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저놈이 서도준 디렉터한테 개겼다는 놈이냐?” “어린놈이 겁대가리를 상실했지. 오늘로 선수 생명 끝장날 거야.”
서준이 출발대에 서자, 야유에 가까운 소음이 풀 전체에 울렸다. 한 위원회 임원은 보란 듯이 심판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무언가 속삭였다. 모든 것이,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완벽하게 설계된 무대였다.
서준은 눈을 감았다.
순간, 그의 귓가에서 수영장의 소음이 사라졌다. 대신, 노량진 시장의 비린내와 경매사의 외침, 어부들의 고함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지금 수영장이 아닌, 혼탁하고 거친 비열한 거리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네 심장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듣지 마라.’
쿵… 쿵… 쿵… 고요하고, 강인한 박동이 그의 온몸을 지배했다.
삐-!
총성과 함께, 서준은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야유도, 압박도, 편파 판정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자신과 물, 그리고 심장의 박동만이 존재했다. 그는 기록을 위해 헤엄치지 않았다. 자신을 옭아매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헤엄쳤다.
그의 영법은 이전보다 더 부드럽고, 더 강력해져 있었다. 마치 물 자체가 되어 흐르는 듯한 움직임.
터치패드를 찍는 순간, 전광판의 숫자가 모든 것을 증명했다. 그의 개인 최고 기록을 0.5초나 앞당긴, 압도적인 기록.
소음으로 가득 찼던 수영장에 침묵이 흘렀다. 코치들은 입을 다물었고, 위원회 임원의 얼굴은 굳어졌다. 그들은 괴물을 잡기 위해 덫을 놓았지만, 그 덫을 부수고 더 강력한 괴물이 되어버린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서준이 물 밖으로 나올 때였다. 구석에서 조용히 모든 것을 지켜보던, 희끗한 머리의 늙은 코치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던, 잊힌 사람이었다.
“자네… 혹시 주진우 코치 제자인가?”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10년 전, 내 제자도… 똑같은 방법으로 꿈을 접어야 했네. 이강호와 같은 해에 사라진 내 제자… 그 아이의 기록이 담긴 훈련 일지가 아직 내게 있네.”
그 순간, 관중석에서 이 모든 광경을 캠코더로 촬영하던 최서연의 눈이 번뜩였다.
흩어져 있던 피해자들이,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시스템에 맞선 반격의 서막이, 마침내 오르고 있었다.
제17장: 승리의 무게
터치패드를 찍는 순간, 전광판의 숫자는 의심의 여지 없는 승리를 선언했다. 그의 개인 최고 기록을 0.5초나 앞당긴, 압도적인 기록.
하지만 수영장에는 환호 대신 섬뜩한 정적이 흘렀다. 야유를 퍼붓던 코치들은 입을 다물었고, 심판석에 앉아있던 위원회 임원은 굳은 얼굴로 옆 사람과 무언가 짧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놀라움이 아니라, 성가신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듯한 차가운 계산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승리가 아니었다. 시스템의 턱밑에 칼을 들이댄,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서준이 물 밖으로 나왔을 때, 그 누구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풀사이드의 코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등을 돌려 자기 선수들을 챙기거나, 딴청을 피우며 자리를 떴다. 그들은 서준을, 만져서는 안 될 위험한 존재로 취급했다. 동정이나 축하가 아닌, 철저한 외면. 그것이 시스템이 개인에게 가하는 가장 현실적인 폭력이었다.
탈의실에서 혼자 짐을 챙기는 서준에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새치’ 황인철이었다. 그는 오늘 몰래 관중석에 숨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단하더구나. 근데… 이제부터가 진짜 큰일이다.” 그는 서준의 어깨를 툭 치며 씁쓸하게 말했다. “저놈들은 이제 널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야. 그냥 부러뜨리려고 들겠지. 조심해라. 물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그의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과거에 비슷한 일을 겪었던 자의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그날 밤. 서울 변두리의 허름한 복싱 체육관. 샌드백 터지는 소리만이 간간이 울리는 그곳에서, 은퇴한 늙은 코치 강태수가 스마트폰으로 전송된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서준의 기록회 영상이었다. 영상을 보내준 건, 아직 연맹에 남아있는 마음 맞는 후배 코치였다.
“살아있네… 저 눈빛…”
강태수는 10년 전, 자신의 제자였던 이지훈을 떠올렸다. 이강호와 같은 해에, 비슷한 재능을 가졌지만 다른 종목에서 활약했던 선수. 그 역시 위원회의 파벌 싸움과 후원사 입김에 밀려, 있지도 않은 부상 스캔들로 매장당해야 했다. 강태수는 그때 저항하지 못했다. 제자 하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밥줄과 남은 제자들의 미래를 걸 수 없었다. 그 비겁함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가슴에 납덩이처럼 남아 있었다.
그는 서준의 모습에서 지켜주지 못했던 제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저 아이도 결국 똑같은 방식으로 부서지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다시 그 더러운 물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영상을 끄려는 순간, 마지막 터치패드를 찍고 주위를 둘러보는 서준의 외로운 눈빛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주진우에게 직접 연락할 용기는 없었다. 대신, 그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봤던 한 기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시스템에 대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던, ‘뉴스 프로브’의 최서연 기자. 그는 공중전화로 달려가,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뉴스 프로브, 최서연 기자님 되십니까.” “네, 맞는데 누구시죠?” “이름은… 밝힐 수 없습니다. 그냥, 수영장에 늙은이가 하나 있다고만 알아두쇼.” 강태수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당신이 찾는 거…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소. 10년 묵은 일지(日誌) 하나가 있는데… 관심 있소?”
최서연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평범한 제보가 아님을 깨달았다.
다음 날, 약속 장소인 복싱 체육관에서 마주한 강태수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최서연을 맞았다. 그는 낡고 누렇게 변색된 훈련 일지 한 권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이지훈 선수의 훈련 일지였다.
“가져가쇼. 대신 내 이름은 절대, 어디에도 나와선 안 되오.”
최서연은 조심스럽게 일지를 펼쳤다. 빼곡하게 적힌 훈련 내용과 기록들. 그리고 페이지 곳곳에, 이지훈 선수가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짧은 메모들이 있었다.
‘오늘 코치님이 아닌 위원회 사람이 와서 훈련을 지켜봤다. 기분이 나빴다.’ ‘후원사 아들이라는 녀석이 내 레인에서 헤엄쳤다. 나보다 한참 느렸다.’ ‘코치님이 힘든 표정이다. 나 때문에 곤란해지신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깨가 아프지 않은데,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고 한다. 뭔가 이상하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날짜도 적히지 않은 채, 번진 글씨로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수영이… 무서워졌다.’
그것은 단순한 훈련 일지가 아니었다. 시스템이 한 젊은 선수의 꿈과 영혼을 어떻게 서서히 갉아먹고 파괴했는지에 대한, 처절한 기록이었다. 최서연은 이 일지가 자신이 찾던 ‘패턴’의 가장 결정적인 증거임을 깨달았다. 돈 봉투가 오간 정황 증거와, 이 살아있는 증언이 결합된다면…
그녀는 강태수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 용기, 절대 헛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최서연은 곧바로 주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치님. 박민준, 이지훈, 그리고 이강호… 제가 이 세 개의 점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선을 세상에 보여줄 마지막 한 점입니다. 바로 한서준이라는 이름의 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