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현재, 대한민국 수영계에는 단 하나의 신(神)만이 존재한다. 바로 ‘한국수영위원회 (Korea Swimming Committee – KSC) 엘리트 센터’, 통칭 ‘프로젝트 포세이돈’
포세이돈은 국가대표를 ‘생산’하는 거대한 공장이다. 최첨단 수력학 분석 시스템, 빅데이터 기반의 훈련 프로그램, 전담 영양사와 심리학자까지. 이곳에 선발된 10대 선수들은 ‘수영’이 아닌 ‘결과’를 배운다. 부모의 재력, 인맥, 그리고 코칭스태프의 정치력은 재능만큼이나 중요한 선발 기준이 된 지 오래다. 포세이돈의 아이들은 국가대표가 되고, 올림픽에 나가고, 연금과 광고 계약으로 보상받는다. 이것이 2025년의 유일한 ‘성공 신화’다.

하지만 불과 10년 전, 수영계에는 또 다른 길이 존재했다.
2015년, 진천선수촌 수영장. 베이징 올림픽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며 위원회가 야심 차게 출범시킨 ‘프로젝트 포세이돈’ 1기 핵심 멤버 ‘서도준’. 그는 시스템이 빚어낸 완벽한 작품이다. 190cm가 넘는 신체, 컴퓨터처럼 정확한 스트로크, 그리고 어떤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철 멘탈까지. 언론은 그를 ‘물의 알파고’라 불렀다.
그의 맞은편 4번 레인에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결승에 올라온 한 명의 이단아(異端兒)가 있었다. 경상남도 마산의 낡은 시립 수영장에서 훈련하는 ‘이강호’. 지원금 하나 없이, 은퇴한 아버지를 코치 삼아 새벽 수영을 하는 ‘흙수저’였다. 그의 영법은 교과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투박하고, 거칠었지만, 마치 성난 파도처럼 레인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수영에서 사라져가는 ‘낭만’을 보았다.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 0.01초를 다투는 숨 막히는 접전 끝에, 터치패드를 먼저 찍은 것은 이강호였다.
그러나 전광판에 1위로 뜬 이름은 서도준.
협회는 이강호의 턴 동작 중 미세한 규정 위반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강호의 아버지가 거세게 항의했지만, 그는 곧 심판진의 경고와 다른 학부모들의 싸늘한 외면 속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서도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인터뷰했고, 이강호는 수건을 뒤집어쓴 채 수영장을 빠져나갔다.
그날 이후, 서도준은 국가대표가 되어 몇 개의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고 은퇴 후 포세이돈의 스타 코치가 되었다. 이강호는 그랑프리 대회를 끝으로 수영계를 떠났다는 소문만 남긴 채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프로젝트 포세이돈’은 더욱 견고한 그들만의 리그가 되었다. 막대한 예산은 서울의 센터에만 집중됐고, 지방의 수영장은 경영난으로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이강호’와 같은 이야기는 이제 정말 전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었다. 동네 수영장에서 재능을 발견하고, 열정 하나로 국가대표에 도전하는 것은 바보 같은 망상 취급을 받는다.
2025년 10월, 경기도 외곽의 한 도시.
‘부영 시민 수영장’ 정문에 붉은 글씨의 현수막이 나붙었다.
[경영 악화로 인한 폐관 안내. 12월 31일부로 운영을 종료합니다.]
락스 냄새와 아이들의 함성이 뒤섞인 낡은 수영장. 그곳 3번 레인 끝에서, 한 소년이 벽에 붙은 현수막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닳아빠진 수영복, 몇 번이나 끈을 갈아 끼운 낡은 수경. 소년의 어깨는 아직 다 자라지 않았지만, 물을 밀어내는 그의 팔에는 불균형할 정도로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소년은 곧 고개를 돌려 다시 물속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눈에는 체념도, 분노도 아닌, 차갑고 고요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이제 그가 헤엄쳐야 할 물길이, 이곳 수영장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음을 직감하는 듯.
제1장: 낡은 태블릿, 마지막 스승
소년의 이름은 한서준. 열여덟. 그의 세상은 ‘부영 시민 수영장’의 25미터 레인 안팎이 전부다.
새벽 5시, 서준은 아직 문이 열리지 않은 수영장 셔터를 관리인 아저씨와 함께 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낡은 청소 도구로 수영장 바닥을 밀고, 밤새 쌓인 부유물을 뜰채로 건져내는 아르바이트. 그 대가로 오전 시간 동안 3번 레인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어이, 한서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희끗희끗한 머리의 최 관장이 벤치에 앉아 그를 보고 있다.
그의 손에는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최 관장은 이 수영장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산증인이다.
한때는 촉망받는 선수였고, 은퇴 후에는 이곳에서 수십 년간 아이들을 가르쳤다.
지금은 서준의 유일한 스승이기도 하다.
“오늘 기록, 0.2초 줄었네.
막판 스퍼트 할 때 상체가 약간 들리더라. 작은 변화지만 반복되면 곤란해”
감흥 없는 말투였지만, 0.2초의 단축을 알아본 것은 수영장 전체에서 최 관장뿐이었다.
서준은 말없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장님,” 서준이 물 밖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현수막 봤어요.”
최 관장은 대답 대신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썼다. 커피 때문인지, 현실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청 놈들이 용역 깡패보다 더 해. 적자라는 말 한마디면 다 끝이야. 여기 허물고 뭐 복합 쇼핑몰 짓는다나.” “……”
“너도 이제 그만둬라. 이 나이에 수영 붙잡고 있는다고 밥이 나오냐, 대학을 보내주냐. 네 성적이면 인서울은 몰라도 지거국은 간다며. 괜한 고생말고 남들처럼 공부해.”
최 관장의 말은 진심이었다.
재능은 보였다. 하지만 재능만으로는 저 거대한 벽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저 아이의 재능이, 저 순수한 열정이 ‘프로젝트 포세이돈’이라는 괴물 앞에서 어떻게 짓밟힐지 눈에 선했다. 10년 전, 그가 지켜봤던 ‘이강호’처럼.
“서울로 가려구요.”
서준의 한마디에 최 관장의 눈이 커졌다.
“뭐?” “포세이돈에 들어가겠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서준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이답지 않게 차분했다. “서울에도 동네 수영장은 있겠죠. 거기서부터 시작할 겁니다.” “시작해서 뭘 어쩌게? 걔들이랑 붙어서 이기기라도 하겠다고? 미친 소리!”
최 관장은 벌떡 일어섰다. “너, 걔들이 어떤 애들인지 알아? 네가 새벽에 청소하고 훈련할 때, 걔들은 전담 트레이너 붙어서 근육 하나하나 관리받는 애들이야. 넌 수영복 하나를 2년 넘게 입는데, 걔들은 대회마다 최신 기술 들어간 수백만 원짜리 전신 수영복을 갈아입는다고!
이게 싸움이 된다고 생각하냐?”
“네.” 서준이 최 관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싸움은 됩니다.”
그 눈빛. 최 관장은 순간 숨을 멈췄다. 모든 걸 체념한 듯 보였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이글거리는 불씨가 보였다. 10년 전, 억울한 판정에도 끝까지 심판석을 노려보던 ‘이강호’의 바로 그 눈빛이다.
최 관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탈의실 구석에 있는 낡은 캐비닛으로 향했다. 먼지 쌓인 캐비닛을 열자, 그 안에서 비닐에 몇 겹이나 싸인 구형 태블릿 하나가 나왔다.
“가져가라.”
최 관장이 서준에게 태블릿을 건넸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겨우 켜졌다. 바탕화면에는 수많은 영상 파일과 데이터 분석 폴더가 가득했다. 폴더의 이름은 ‘KANG-HO’.
“10년 전, 이강호의 모든 훈련 영상과 기록이다. 내가 미친놈처럼 밤새 찍고 분석했던 자료지.”
최 관장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강호가 그냥 타고난 천재인 줄 알지만, 아니야. 놈은 누구보다 영리하게 수영을 했어. 한국인의 체형에 맞는 가장 효율적인 영법을, 저항을 가장 적게 받는 입수 각도를, 자기 혼자 맨몸으로 부딪쳐가며 완성시켰다고. 포세이돈 놈들은 그 가치를 몰라. 아니, 알면서도 뭉개버렸지.”
최 관장은 서준의 어깨를 잡았다.
“포세이돈 놈들의 수영은 ‘정답’이다. 하지만 이강호의 수영은 ‘해답’이었어. 정답은 하나지만, 해답은 여러 개일 수 있거든. 서울 가서 놈들의 수영을 보고 겁먹지 마라. 그리고 이 안에 있는 걸 네 것으로 만들어. 이게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전부다.”
그날 오후, 한서준은 고속버스 터미널에 섰다. 어깨에는 낡은 가방 하나. 가방 속에는 닳아빠진 수영복 두 벌과 10년 전의 시간이 담긴 태블릿이 들어있었다.

버스가 서울을 향해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차창 밖으로 ‘부영 시민 수영장’의 익숙한 건물이 빠르게 멀어져 갔다. 서준은 눈을 감았다. 락스 냄새,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차가운 물의 감촉. 자신의 세상 전부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했다.
그의 도전은 서울의 가장 변두리에 있는, 낡은 수영장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제2장: 별빛 수영장의 터줏대감
서준이 서울에서 처음 발을 디딘 곳은 신림동의 좁은 골목, 창문도 없는 월 28만 원짜리 고시원이었다. 방음이라곤 없는 얇은 합판 벽 너머로 누군가의 기침 소리와 키보드 소리가 밤새 들려왔다.

서준은 새벽마다 인력 시장에 나가 일용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짐을 나르고, 공사 현장을 청소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고 몸은 쇳덩이처럼 무거웠지만, 그는 매일 오후 3시면 어김없이 버스를 타고 ‘관악 별빛 스포츠센터’로 향했다. 서울에서 가장 저렴한 구립 수영장이었다.
‘별빛’이라는 낭만적인 이름과 달리, 수영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아쿠아로빅을 하는 어르신들의 함성, 강습반 아이들의 물장구, 그리고 각자의 속도로 레인을 점령한 수십 명의 사람들. 이곳에서 훈련은 사치였다. 서준은 그저 사람들 틈에 섞여 물의 감각을 잃지 않으려 애쓸 뿐이었다.
그곳에는 암묵적인 서열이 존재했다. 최상급자 레인인 ‘마스터즈 레인’은 ‘황새치’라는 별명을 가진 40대 남자가 지배하고 있었다. 전신 수영복에 오리발까지 갖춘 그는 동호회 수영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웬만한 20대 선수 출신들도 그의 지구력과 스피드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었다. 그는 레인의 ‘황제’였고, 다른 회원들은 그의 페이스에 맞춰 거리를 벌리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서준은 며칠간 그를 지켜봤다. 그리고 조용히 마스터즈 레인으로 들어섰다.
서준이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인의 리듬이 깨지기 시작했다. 서준은 ‘황새치’의 바로 뒤에 바싹 붙어 그의 물살을 그대로 타고 있었다. ‘황새치’가 속도를 올리면, 서준도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몇 바퀴가 지나자 ‘황새치’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완벽한 통제 하에 있던 레인에 불순물이 끼어든 듯한 불쾌감.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황새치’는 승부수를 던졌다. 턴을 하는 순간, 평소보다 훨씬 강력한 돌핀킥으로 치고 나간 것이다. 동호회 수준에서는 반칙에 가까운 기술. 보통 사람이라면 순식간에 멀어질 거리였다.
하지만 서준은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 관장이 보여준 이강호의 영상. 이강호는 턴 직후, 강력한 돌핀킥 대신 물의 저항이 가장 적은 깊이로 몸을 유선형으로 유지하며 최대한 길게 미끄러져 나갔다. 힘의 낭비를 최소화하는, 뱀장어 같은 움직임이었다.
‘황새치’가 힘으로 물을 차내며 앞으로 나아갈 때, 서준은 조용히 물속을 활공했다.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자, 둘의 거리는 거의 그대로였다. 오히려 힘을 아낀 서준 쪽이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
거기서 승부는 갈렸다.
50미터를 남기고 ‘황새치’의 어깨가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반면 서준은 최 관장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물을 끝까지 밀어주는’ 스트로크로 막판 스퍼트를 시작했다. 투박했지만, 한 번 팔을 저을 때마다 몸이 미사일처럼 쏘아져 나갔다.
결국 서준이 먼저 터치패드를 찍었다. 공식적인 기록도, 환호하는 관중도 없는 그들만의 레이스였다.
“헉… 헉…”
‘황새치’는 레인 끝에 매달려 숨을 몰아쉬었다. 분노나 패배감이 아니었다. 순수한 경탄의 눈빛으로 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생… 수영, 어디서 했어? 선수 출신이야?”
“아닙니다.” 서준은 짧게 대답하고 물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잠깐만.” ‘황새치’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혹시… ‘프로젝트 포세이돈’ 선발전에 관심 있어? 다음 달에 비공개 테스트가 있는데, 내가 추천해 줄 수 있어. 학생 실력이면…”
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거긴 제가 갈 곳이 아닙니다.”
“뭐? 아니, 대한민국에서 수영 좀 한다는 애들은 다 거기 못 들어가서 안달인데… 대체 목표가 뭔데?”
서준은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텅 빈 관중석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이 작은 동네 수영장을 넘어, 서울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있었다.
“포세이돈과 싸울 겁니다.”
황당한 말이었지만, ‘황새치’는 서준의 눈에서 농담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좋아. 그 목표가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 동호회 애들부터 꺾어봐. 매주 토요일 아침, 여기서 기록 측정 하거든. 다들 나처럼 한가닥 하던 사람들이야. 네가 여기서 전부 이기면, 내가 다음 ‘도장’을 소개해 주지.”
‘황새치’, 본명 황인철. 그는 한때 포세이돈의 전신인 국가대표 상비군에 몸담았다가, 파벌 싸움에 밀려 꿈을 접어야 했던 비운의 선수였다. 그는 서준에게서 10년 전 사라졌던 ‘이강호’의 그림자를, 그리고 자신이 잃어버렸던 ‘낭만’을 보았다.
한서준의 첫 번째 ‘도장깨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